“장애인이 차별받는 이유는 당신이 장애가 있어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당신이 장애인이기에 차별하는 것이다.”(『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김도현 씀)라는 말은 아리송하고 참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식의 식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차별)는 사람이 사회(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몇천 년 혹은 몇만 년 전부터 시작해 2012년 현재까지 정말 지긋지긋하게 식상한 이야기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지금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권리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침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2001년 오이도역(4호선)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 한 분이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을 계기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이동권)’라는 말이 하나의 사회적 의제(議題)가 되었다.
![]() ▲2002년 5월 발산역에서 일어난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한 항의로 시청역(1호선)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였다. ⓒ2002 인권운동사랑방 |
당시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라는 제목으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버스타기 투쟁을 했었다. 투쟁 초기에는 경찰보다 일반 시민이 우리를 막아섰는데, 그때마다 자주 했던 말이 “이것은 여러분 같은(지체장애인) 사람들이 타는 게 아니야! 여러분이 탈 수 있는 버스(리프트 장착 셔틀버스)가 따로 있는데 왜 이래?”였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닌가! 100여 년 전 미국에 백인만이 앉을 수 있는 버스 전용좌석이 있었는데, 거기에 흑인이 앉게 되면 백인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막 21세기에 들어선 그때 장애인이 따로 이용하지 못하는 버스와 이용할 수 있는 버스가 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존재하고, 이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사회)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의 반문에 장애인 당사자들 또한 제대로 답을 못했으며 대중교통이라고 불리는 지하철, 버스, 택시 등 교통수단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차별이고 빼앗긴 권리라고 인식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인권(人權)을 말하자!
국제적인 사례를 보면 최초의 인권선언은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가 인권에 관해 채택, 발표한 것이며, 한 국가만이 아닌 국제사회가 뜻을 모은 선언은 1948년 12월 10일, 제3회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채택한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이다. 장애인 인권은 이 선언에서 장애로 말미암아 종교, 문화, 정치, 사회영역, 재화, 서비스, 교육, 구직 등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 선언에 우리나라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현재 개인소득 2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지만, 장애인복지의 예산과 수준은 중하위권이다. 2001년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기점으로 장애인교육권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 탈시설 문제를 포함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투쟁,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부양의무자 제도 폐지 투쟁,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 발달장애인법 제정 투쟁 등 11년 동안 수많은 투쟁이 봇물처럼 일어났다. 이 중에는 나름대로 성과를 남기기도 했으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생존권이 위협받을 만큼 심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큰 사안별로 이야기했지만, 장애인의 차별이 큰 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가족이나 큰 틀의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당했지만, 이젠 실생활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갈등으로 골이 깊어지고 있으며 차별을 받아왔던 장애인이 오히려 어떠한 계층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사례도 있다.
바로 활동보조서비스에서 나타나는 일들이다. 사회적일자리로 치장된 활동보조인의 특별한 업무 형태에 대해 몇몇 장애인들은 마치 활동보조인을 고용한 걸로 오해해 활동보조인을 마치 하인(?) 부리듯이 하고 좋지 않은 사건들의 가해자가 되는 사례들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이건 비단 이용장애인과 활동보조인만의 사례만이 아니라 센터와 활동보조인 사이에도 서로 오해한 나머지 우려스러운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아무래도 방어 능력이 떨어지는 중증장애인(시설 장애인들의 사례에서 종종 나타남)들에게 당사자의 결정권을 심각히 침해하고 반자립생활적인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리고 시설장이 장애인의 수급권을 착복하고, 신성한 학교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이러한 일들을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야합해 은폐시키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얼마 전 늙은 아비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수급권을 신청했으나, 부양의무제라는 덫에 걸려 신청이 탈락하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아들의 수급권을 보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를 보면서 옛날에 양반이 천민을 핍박하고 남성이 우선시되는 가부장제와 백인이 흑인을 차별했던 것처럼, 사회적 통념과 사회적 기득권으로 계층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개인의 위치와 권력에 의해 개별적으로 차별하고 핍박하고 있으며, 그 후유증은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영화 '도가니'의 흥행으로 다행히 실화의 배경이었던 광주인화학교 문제는 가해자 선생들이 처벌되고 사회복지사업법 개정과 장애아동에 대한 성폭력의 경각심이 전 국민적으로 확산하는 등 나름의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기초법상 부양의무제 폐지와 발달장애인법 제정,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활동지원법 독소조항 개정 등 우리가 싸워야 할 과제들이 많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국가가 잘 살아야 한다는 전제로 가난한 이들 혹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든 아니든 인간은 만인 앞에 평등하며 인간으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는 사회적 위치와 권력, 때론 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인권으로 말해야 한다고 본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차 버리자!
왠지 백인이 흑인이나 황인보다 우월할 거 같은 생각,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세기에 보호하고 군림하려는 생각, 이성 외에 사랑은 인정하지 않고 왠지 다르게 바라보는 눈길과 편견, 또 장애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생각, 이러한 것들은 그들 간의 차이와 다름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차이에 대해 아직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내면 깊이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 같다.
지난 2003년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의 슬로건이 바로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차 버리자!’였다. 그때는 이 말이 크게 와 닿진 않고 그냥 '괜찮네?' 정도였다. 그런데 10년의 활동을 통해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 느끼고 있다. 이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이 사회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을 거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맨 앞에 썼던 말의 주어를 바꾼다면 아마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만약 “여성이 차별받는 이유는 당신이 여성이어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하는 것이다”라고 말로 바꾼다면 어떨까?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에게도 질문을 던지며 갈무리할까 한다.
“여러분(나) 자신보다 가난해서, 자신보다 무식해서, 자신보다 부족한 거 같아서, 자신보다 다르기에, 그 사람을 다르게 생각하거나 왜곡하거나 그로 인해 차별하진 않으셨는지요?”
* 이 글은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린 '장애인, 비장애인을 위한 인권교육'에서 발표한 자료입니다.
박현의 동자스님의 꿈 바라기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날 두고 전생에 동자스님이라 했다. 보통 동자스님은 어릴 적 가족과 헤어져 절에 맡겨진다. 그리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벗 삼아 수행하지만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어떠한 것을 꿈꾸며 희망을 바란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운명처럼 장애인운동을 하게 되었고 많은 소수자를 보면서 장애인운동이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세울 거 없고 잘난 거 없지만, 또한 무언가 내 힘으로 바꾸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가며 갈등하는 완성되지 않은 덜 자란 동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