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사건에서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피해 노동자가 아닌 국가나 사업주가 지도록 제도를 개선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 아래 인권위)는 업무상 질병의 입증책임과 관련해 주장된 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피해노동자가 아닌 상대방이 증명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 법령을 개선하라고 19일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현행 제도에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유해·위험물질을 충분히 다룰 것 △유해·위험물질을 다룬 것 등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될 것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을 것 등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피해노동자가 전문성 및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는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증명해야 해서 쉽게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예를 들면 암의 경우 미국 국립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는 매년 발생하는 암의 2~8%를 직업성 암으로 지난 2007년 추정한 바 있다. 이 비율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2007년 발생한 암 환자 16만 1,920명 중 최소 3,238명에서 최대 1만 2,954명이 직업성 암으로 추정되지만, 2007년에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 사례는 7건에 그쳤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의학적 인과관계 등의 증명은 피해노동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이 부담하고 있다고 설명했으나, 인권위는 요건 증명을 못 했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노동자에게 부담되기에 실제 입증 부담은 피해노동자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인권위는 “헌법의 사회보장 이념, 산업재해보상법의 근로자 보호 목적에 부합되도록, 피해근로자 등은 질병에 걸린 사실과 유해·위험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제기된 질병이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은 상대방이 증명하도록 입증 책임을 배분하는 것으로 관련 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장을 민간인으로 선임하도록 하는 등 독립성, 공정성, 전문성 강화 방안 마련 △2003년 이후 갱신되지 않은 업무상 질병의 구체적 인정기준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을 반영해 정기적으로 추가·보완 △산업재해보상보험급여의 신청서상의 사업주 날인 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독립성, 공정성, 전문성 강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것에 대해서는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위원장으로 위촉됨으로써 위원회의 운영 및 결정이 공단의 이해관계와 재정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라면서 “또한, 개별 회의에 산업의학 전문의가 참여하지 않는 점도 ‘질병의 업무 관련성 및 의학적 인과관계 판단’에 대한 전문성 결여의 요인이 될 수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어 인권위는 업무상 질병이 구체적 인정기준을 정기적으로 추가·보완하라고 권고한 것에 대해서는 “산업의 발달과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직업병이 발생하고, 질병과 업무와의 인과성이 수시로 변함에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3에 해당하는 질병은 2003년 이후 늘어나지 않았다”라면서 “오히려 2008년 7월에는 고혈압성 뇌증이나 협심증 같은 질병은 삭제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이는 산업재해환경의 변화라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면서 “새롭게 발생, 증가하고 있는 직업병 등을 조사, 검토해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으로 지속적, 정기적으로 추가·보완할 것을 권고했다”라고 밝혔다.
인권위는 산업재해보상보험급여 신청서상의 사업주 날인 제도 폐지에 대해서는 “사업주가 피해근로자가 산업재해보상보험 급여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회유하는 목적으로 악용되는 신청서상의 사업주 날인제도를 폐지하도록 권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해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2명에 대해 업무상 질병 때문에 사망했다고 인정하는 판결을 한 바 있다. 이는 그동안 유사한 사건에서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