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삶의 우연성에 대한 마지막 존중

by 베이비 posted Nov 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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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들까지 상세히 밝힌다면, 예를 들어 어떤 형사 피고인에 대한 유죄 판결은 판결 당일 대법관들이 마신 커피가 브라질산이 아니라 콜롬비아산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우리는 세계를 이루는 사건들을 이해하고 그것의 원인을 통제함으로써 세계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과거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현상은 오로지 우연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날씨는 우연의 영역이 아니라, 기압골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변수들로 설명된다. 이처럼 인과의 고리에 대한 치밀한 추적이 가능해질수록 우리는 필연적인 존재가 되고, 모든 사태는 우리가 그 필연성을 조작함으로써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통제의 욕망

여전히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현상이 존재하고, 양자적 수준에서 필연성의 파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여러 요소의 관계를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를 통제할 힘도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통제하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이른바 ‘유전자 혁명’ 시대는 바로 이 통제를 출생 이전의 단계까지 확장시킨다.

아이의 외모와 병력은 물론 성향과 기질까지 선택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삶의 우연성은 더욱 축소될 것이다. 부모의 부(副), 한 사회의 기술력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유전자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 ‘자기 머리칼을 왜 검은색 그대로 두었느냐’는 소송을 걸 것이라는 진지한 농담이 있다. 그러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대거 부모에게 소송을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란 더 이상 출생에 수반하는 우연적 사태가 아니라 부모의 능력에 따라 통제될 수 있는 변수이므로, 아이는 자신의 장애는 물론이고 왜 185㎝까지 자라는 유전자를 선택하지 않았는지도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도 우려했듯이 유전자를 통제하는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어떤 책임이나 의무감도 훨씬 적게 가질 수 있다. 타고난 지능과 외모가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내가 어떤 능력과 몸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얻게 된 재능과 건강에 대해 감사와 책임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 ‘재력 있는 부모’를 만난 것 자체가 우연한 행운이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부유한 부모는 자신이 획득한 부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유전적으로 완벽한’ 아이를 출산했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출생이라는 우연한 사태는 철학자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의 전제지만, 이제 자기에게 우연히 주어진 운명을 자신의 책임으로 간주하고 삶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생에 대한 사랑보다는 유전자 기술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언제나 더 중요할 것이다.

유전자 혁명 시대의 괴물들

유전자 혁명의 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유전적으로 덜 완전한 몸, 질병에 걸렸거나 평균 신장 이하의 키, 고르지 못한 치아, 사회가 덜 가치 있게 여기는 피부색을 가진 몸은 더 이상 우연한 사태가 아니라, 오로지 가난한 부모나 유전자 기술을 잘못 사용한 의사의 과실이 부른 ‘실패작’으로 인식될 것이다. 한편 이 사람들이 더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기도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화재로 숨진 한 중증장애여성의 삶에 대해 사회적인 문제제기를 하지만, 미래에는 왜 그의 장애를 미리 예방하지 않았느냐며 피해자의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목소리는 지금보다 더 커질 수도 있다.

어떠한 것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사회에서 그 통제에 실패했을 때, 예를 들어 날씨를 완벽하게 예측한다고 자부하는 사회에서 태풍으로 이재민들이 생겼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왜 더 잘 통제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노이고, 두 번째는 이재민을 향한 동정이다. 세 번째는 비록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정부와 기상 당국 때문에 화는 나지만 자신의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나에게 이러한 불행을 주신 신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태도다. 마찬가지로 유전자 혁명의 시대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처럼 대표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더 완전하게 만들지 못한 부모와 의료 당국의 책임을 묻거나 (그래서 손해배상 책임을 추궁하며 소송을 걸 수도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난 자신의 ‘불행한 신체’ 안에는 신의 뜻이 있을 거라 믿으며 담담히 살아갈 것이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지극히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을 둘러싼 증오와 동정, 낭만화는 사실 유전자 혁명 이전의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폭발한 장애인운동은 바로 우리의 몸을 둘러싼 이 증오와 동정, 낭만화에 가장 극적으로 저항한다. 부모나 운명에 대한 저주와 증오는 이제 사회제도에 대한 합당한 분노로 변화되었고 동정과 시혜의 시각을 제거하고자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투쟁을 진행했으며, 낭만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자 하는 정신적 시도에 대한 반격도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불만을 품고, 끊임없이 개량과 개조의 욕망에 휩싸일 때, 개량과 개조의 여지조차 없다고 판명된 장애인들은 그 극단에서 장애를 개인적 비극으로부터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결과로 전환시켰다. (휠체어에 앉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자!) 어떤 현상을 사회구조적 모순의 일부로 파악하는 것은 때로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장애인운동에는 다른 것이 있다. 장애는 피부색이나 성별처럼 중립적인 ‘다름’과는 다른 실제적인 고통과 부자유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빠르게 전개될 유전자 혁명의 시대, 즉 모든 인간이 185㎝의 신장과 특정한 머리색, 그 어떤 질병에도 강한 저항력을 갖춘 몸을 욕망하고, 실제 경제적 능력으로 이를 통제까지 하게 될 그 시대에, 장애인운동은 삶의 우연성을 존중하는 마지막 투쟁 영역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자신보다 나은 아이’를 낳고자 하는 시대에 오직 장애인들만이, (물론 그 가운데 놀라운 일부이지만) 자신과 같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낳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유전적으로 완벽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지구 전체가 가득 찬 시대에 이미 태어나 지금을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는 점점 무가치해지지만, 가장 열등하다고 취급받았던 장애가 있는 사람들만이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존재를 가치 있는 무엇으로 만든다.

사실 장애가 있는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하나님이 다 뜻이 있어 네게 장애를 주신 것이다”라는 말이 나를 위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운명애란 내 운명에 어떤 아름다운 가치가 숨어 있으리라 믿는 낭만적 태도는 아니다. 운명은 때로 가혹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되어 있다.’ 운명애는 바로 그 지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잠재적 원리가 숨어 있다는 그 어떤 형이상학적 기대를 철저히 배제한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의 나를 처절하게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나는 이처럼 처절한 태도는 ‘괴물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누구나 괴물 같은 초인이 될 수 없으며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유전자 혁명의 시기로 불리는 우리의 시대에, 장애인운동가들의 자기 인식과 사회변혁을 위한 싸움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괴물 되기’는 나에게 너무 힘든 과제이며 이는 때로 내 삶을 어렵게 만들지만, 이 괴물들은 내 영원한 영웅이며 이들이야말로 가장 섹시하고 가장 매력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괴물 되기를 끊임없이 회피하면서도 다리를 내놓고 수영장에 뛰어들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물리적 한계 속에서도 휠체어에 앉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인파를 뚫고 나아간다. 운명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초인이 될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지만,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완전한 초인이 될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유전적으로 가장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작은 실천들이 집적되고 기록되고 존중될 때 우리는 삶의 우연성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아름다운 방식을 발견한다.

‘마이너리티’, 장애인은 분명 소수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장애를 하나의 철학적·사회적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이처럼 유전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시대를 덮칠 대규모의 혼란을 헤쳐나갈 거의 유일하고 가장 극적인 성찰이며 실천이다. 그런 면에서 불완전한 몸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우리 모두, 그리고 미래의 우리는 이 괴물들의 기록을 참조하고 그를 따라 작은 실천들을 감행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₁. 21세기 시작과 함께 인간 유전정보 지도를 해부한 게놈(genome)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유전자 혁명은 이후 생명공학기술의 혁신적 발전과 그에 따른 인류 문명에 대한 강력한 충격을 예고하는데 사용된 용어이다. 정말 이것이 ‘혁명적’인 것이 될지 아직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난 10년간 생명공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이미 이 혁명이 진짜 혁명이 될 것임을 예증한다. 물론 유전자와 그 유전자의 발현을 통해 개체가 갖게 된 특질(표현형) 간에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매우 복잡한 외생변수들이 출생과정에서 개입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기질들, 예컨대 암의 발생률을 결정하는 유전자나, 머리색 등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매우 직접적으로 각 특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전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될수록 우리가 표현형을 통제하는 능력이 점차 확장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₂. 이러한 소는 이미 제기된 바 있다. 99년 우리나라 대법원에는 의사가 장애아 임신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해 다운증후군을 출산한 한 여성이 의사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청구하는 사건이 제기되었고, 2002년 유사한 사건이 또 제기되었을 때 대법원의 결론은, 장애아의 출산 자체를 손해로 볼 수는 없지만 예측하지 못한 '정신적 충격'에 따른 위자료는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₃.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장애에 부여된 ‘고통’과 실존적인 부자유 역시 사회적, 구조적 요소와 관련된 것이라는 견해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 이 글은 진보적 기독교 잡지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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