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우리의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

by 베이비 posted Nov 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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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주제로 22일 늦은 2시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강의는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주최로 마련된 ‘장애인 교육철학 강좌’ 첫 번째 시간이었다.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는 지난 22일, 23일 이틀 동안 '장애인 교육철학 강좌'를 열었다. 장애인야학 교사를 대상으로 진행된 이번 강좌는 고병권 수유너머R 연구원, 노일경 방송통신대학교 연구원, 김도현 함께웃는날 편집장, 김치훈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정책실장 등이 강사로 나섰다. 이번 강좌의 내용을 살펴본다._편집자주

앎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교도소에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악함에 관해 이야기하며 강의 중 이런 말을 하게 됐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마란 악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쉬는 시간에 한 수감자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교도소에 오게 됐는지 이야기했습니다.

50대 초반의 남성인 그는 80세 아버지와 고등학생 두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등학생인 두 자녀가 평일 낮에 일찍 집에 왔길래 왜 이렇게 일찍 왔니, 물으니 몇 달 동안 학교 등록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때마침 회사에서 받지 못한 체불임금이 있어 그 돈을 받으러 회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소장이 돈을 주지 않고 도망간 겁니다. 비가 오던 그날, 그는 홧김에 휘발유로 불을 지르고 맙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그 순간 제가 어떻게 생각해야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그 안에 있던 모든 수감자가 저희를 바라봤습니다. 그때 전, 압도당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 강의를 들어도 그 문제를 풀 수 없는 상황임이 명백해지니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죠. 차라리 그때 그가 헤겔 철학 등에 대해 물었다면 제가 답하기 더 편했을까요.

그런데 한 달 강의가 끝나고 수료식이 있던 날, 그분이 역으로 제게 답을 줬습니다.

‘괜찮아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앞으로 계속 생각해볼 겁니다.’

네, 그가 그 문제를 계속 가지고 있는 한 그는 다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계속 묻는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한 번의 믿음에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알았기에 계속 배울 수밖에 없으며, 배움 속에서 우리는 배우는 자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고병권 연구원은 "오늘날의 삶과 앎은 분리되어 있다"라고 전했다.


앎과 삶이 뒤엉킨 현장에서

하나의 물음을 던져보자. 고학력의 시대, 높은 학벌만큼, 차고 넘치는 전국 대학의 숫자만큼 우리의 ‘앎’은 풍성해졌는가?

이 물음은 다소 엉뚱하다. 오늘날 대학과 앎을 연결 짓는다는 것은 그렇게 별개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혹은 예전에 배웠던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삶과 어떠한 관계성을 맺고 있는가.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은 ‘근대의 앎’ 이면에는 냉소주의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지금-여기의 삶과 앎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의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냉소주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앎과 삶이 무관하기 때문이죠. 알고 있어도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근대적 앎이 삶과 무관해지면서 부조리해지기도 했지만, 앎이 삶의 구조적 차별과 마주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묘한 부조리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왜 차별을 받지?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 물음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지만, 점점 근본적 문제로 들어가게 되죠. 그때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진리, 도덕적 선 등을 치장하는 논리 속에 나에 대한 배제가 스며들어 있음을.”

오늘날 앎이 부조리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고 연구원은 배움의 주체에서 찾는다. 장애인 등 이 사회의 구조적 차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텍스트 삼아 앎을 깨달아 간다. 이들에게 삶과 앎은 무관하지 않다. 앎과 삶이 뒤엉킨 그 현장에서 배움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안에 맹수가 살고 있다.’

‘우리의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주제로 22일 늦은 2시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고 연구원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강의는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주최로 마련된 ‘장애인 교육철학 강좌’ 첫 번째 시간이었다.

고 연구원은 노들장애인야학 불수레반(중학교과정)에서 2008년 하반기 인문학 수업을 진행했으며, 그 외에 교도소 수감자와 탈성매매 여성 등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한 바 있다.

대한민국 대학 진학률은 80%에 달하지만 장애인의 절반 이상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열 살이 넘어서야 한글을 배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글을 읽기도 벅찬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
“2008년, 하반기에 노들야학 불수레반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6개월간 읽었어요.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구절들을 뽑아 수업시간에 제가 네다섯 번 정도 큰 소리로 읽는 거죠. 처음에는 학생들이 굉장히 지루해했어요. 그런데 수업 중반부에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일화가 책에 있는데, 그 중 '우리 안에 맹수들이 살고 있다'라는 구절이었어요.

‘우리 안에 맹수가 살고 있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괴성을 질렀습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괴물을 안다고. 나를 계속 상처 입히고, 으르렁거리는 그 괴물이 무엇인지 안다고, 확신한다고. 많은 학생이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어떤 학자가 이토록 앎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가 읽어내지 못하는 부분을 중등과정에 있는 중증장애인이 읽어낸 겁니다.”

고 연구원은 대학과 대학 바깥은 ‘질문의 언어’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질문이란 앎과 앎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다. 질문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앎을 받아들이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과 대학 아닌 곳에서 강의했을 때, 그 둘은 질문 자체가 다릅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선 질문하는 사람들이 질문 안에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책 등을 넣으려고 해요. 예를 들면, 니체에 관해 이야기하면 다른 철학자의 개념을 가져와 비교하려 하거든요. 그런데 대학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내용 중에 ‘저것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라며 말과 경험의 충돌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책처럼 넘겨서 거기서 배움을 창조하죠.”

자신의 삶을 참조 삼아 일어난 앎은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지면서 앎은 앎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의 앎은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의 변화로 드러난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다고 머리 자르는 사람은 본 적 없어요. 그러나 이들은 갑자기 옷을 달리 입는다든지, 머리를 자르고 온다든지 다른 형태로 앎이 드러납니다. 노숙인들의 경우가 특히 그래요. 농담으로 씻는 사람과 씻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은 인문학 과정을 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할 만큼 배움이 신체적 효과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했는데 누군가 목욕을 하고 왔다면, 이 둘은 연관이 있는 거겠죠. 그리고 이것이 삶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고 연구원은 이러한 배움의 현장을 ‘현장인문학’이라 명했다. 고 연구원은 “현장이란 현(현대, 현재)+장(장소, 공간)이 합쳐진 말로 시간과 장소가 담긴 단어”라며 “‘배움이란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라는 의미로 현장인문학이라는 단어를 쓴다”라고 밝혔다.

▲이날 강의를 듣고 있는 장애인야학 교사들의 모습. '장애인 교육철학 강좌'는 전국 장애인야학 교사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이 사회의 ‘정상성’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그런데 정상성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앎을 지니게 된 이들은 이제 이에 대해 묻게 된다.

고 연구원은 한 예로 2001년 장애인의 날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에서 학생들이 시민에게 나눠준 유인물의 글을 제시했다. 그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인간승리… 동정… 해마다 이날이 되면 대중매체들은 하나같이 특집을 내보낸다. 그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미담들이다.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공을 거둔 ‘인간 승리자’를 칭찬하거나 어렵게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찾아내어 ‘우리 이웃’이라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래서 모두가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장애는 ‘정말’ 극복되어야 하는 것일까?”

고 연구원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장애인인 채로' 행복하면 안 되는가? 행복하려면 지금 이 순간에서 꼭 벗어나야만 하는가?”

고 연구원은 “백인이 백인으로 정의될 때는 유색인을 만났을 때”라면서 “정상성 그 자체는 차별하는 기준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애초에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척도 자체가 고통을 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정상성이라는 전선이 그어지자 하나의 현상이었던 그것은 ‘장애’라고 명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애는 정상성 범주의 바깥으로 밀리고 이에 대한 차별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전선은 이 사회의 구조를 이루는 뼈대들이다. 사회적 구조에 의해 억압받고 배제되었던 이들은 그전까지 너무 당연히 받아들였던 척도 자체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향해 묻는다. 그러나 물음을 더욱 밀고 나갈수록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상태, 이것은 무지몽매가 아니라 이 문제가 쉽지 않다는 걸 뜻합니다. 이들은 이제 ‘학자-되기’를 통해 구조 자체의 폭력성을 알게 되고 우리가 이 사회의 ‘진리’라고 믿었던 진리가 폭력이고 어리석음일 수 있다는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이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진리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내가 이 시대의 진리라고 믿고 있던 것은 나 자신을 규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구조적 폭력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았던 이들은 학자-되기를 통해 이 모든 것에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이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선을 넘어서고자 하는 투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전선 자체를 부수고자 하는.

▲고병권 연구원은 "앎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진실로 앎을 가르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당신의 배움이 우리의 배움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면

삶을 만난 앎은 격렬해진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앎이 아니다. 사회적 차별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앎을 전해주는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르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고 연구원은 몇 해 전 교도소에 처음 강의를 나갔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강의를 하는가. 나 또한 정신의 교도관이 되는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을 훈육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법전에 쓰여 있는 규범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규범이란 것도 있습니다.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것과 법이 맞지 않으면 법을 고치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인문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즉 교사로 그들 앞에 선 사람들이 앎을 전하고자 할 때, 그 앎은 어떠한 앎이어야 하는가? ‘정신의 교도관’으로서 그들을 훈육하고자 하는 앎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교사는 앎과 삶에 대한 신실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수업이 인터넷강의로 이뤄지는데 학자가 글을 쓰고 전달은 배우와 성우가 합니다. 교수보다 배우와 성우가 더 ‘전달’을 잘하기 때문이죠. 이상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앎과 삶이 떨어져 있기에 가능합니다.

앎의 성격이 이렇게 변했는데 앎이 삶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앎이 삶을 바꾼 경험이 없는 사람이 상대방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앎을 전하는 사람이 앎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그 앎이 자기한테 효과가 없었듯, 전하는 앎 또한 효과가 없습니다.”

배우는 자에게 앎이 삶을 구원하는 사건이 일어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 앎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또한 같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고 고 연구원은 전했다. 한 시대의 진리와 어리석음은 전복되고, 길항하듯 흐르던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앎 속에서 만난다.

“한 시대의 진리와 어리석음은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의 진리는 한 시대의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조에 의해 한계에 봉착하고 그걸 깨닫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 역시 그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위치, 배제된 위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장애인·탈성매매 여성·수감자-되기’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자격 조건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딪히는 사건 속에 나를 열어 놓고 과정에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현장인문학 속에서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학자-되기’가, 교사는 ‘그들(장애인·탈성매매 여성·수감자)-되기’가 되어야 한다. 고 연구원은 앎과 배움에 대해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의 말을 빌리며, 강의를 맺는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의 말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우리를 가르치러 온 것이라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배움이 우리의 배움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공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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