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김주영, 그녀의 삶과 용기를 기억하라

by 베이비 posted Jan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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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김주영 씨가 떠나는 길. 젊은 사람, 그것도 누구보다 삶의 의욕이 강했을 사람이 그렇게 떠나가는 길은 참으로 슬펐다. 소방관은 10여분 만에 도착했다는데 죽음은 그보다도 먼저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일이 제 숨이 멎는 것처럼 아픈 사람들이 함께 모여 흐느끼고 소리를 질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선생이, 한편으로는 정부를 향해, 다른 한편으로는 동지들에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분의 시간도, 단 세 걸음의 거리도, 출구에서는 얼마나 먼가. 언제나 문제는 ‘지금 당장’인데 우리가 사는 길, 특히나 장애인이 사는 길은 언제나 왜 ‘조금만 더 기다려라’인가.


경찰이 복지부에 항의하기 위해 가던 노제 행렬을 가로막았을 때, 누군가 울먹이며 외쳤다. ‘김주영 동지, 살면서 맘대로 여기저기 다닐 수도 없었는데, 지금 이 길에서나마 자유롭게 다니게 하고 싶다’고. 경찰에게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벌금이든 뭐든 다 맞을 테니, 오늘은 그냥 보내달라’고. ‘이 사람 소원이 무엇이었겠냐’고. ‘한 번이라도 마음껏 다녀보는 것 아니었겠느냐’고. ‘한 번이라도 자유롭게’라는 말이 내 가슴을 얼마나 아프게 후벼대던지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 김주영 활동가의 노제 당시, 고인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 선 사람들.


그때 그녀와 함께 생활했던 이들의 울먹임을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정작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이 사람 소원이 무엇이겠느냐’는 물음에서, 정말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녀의 생전에 말 한마디 건네받을 수 있었다면, 길 한 번 걸어볼 수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무슨 말을 듣게 되었을까.


「시사인」의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1979년 담양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삼육재활원에서 생활했고 특수학교인 삼육재활학교에서 고등부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정보처리사 2년 과정을 거쳤고, 다시 직업전문학교에 갔고, 여기서 사무자동화 전문학사 학위를 땄다고 했다. 그리고 한양사이버대학교에 편입해서 전자계산학을 전공했고, 2011년에는 다시 이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무자동화, 전자계산학, 사회복지학…, 그녀는 그렇게 공부의 길을 한 번도 놓지 않고 계속 이어왔다.


그녀는 또한 문화센터에서 미디어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외출 혹은 탈출」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직접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했다고 했다. 그녀의 작품은 제5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에서 ‘젊은이 및 일반’ 부문 작품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장애인 관련 방송 모니터링을 했고, 2006년에는 시민방송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방송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화가이기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녀는 미술 선생님에게 수채화와 유화를 배웠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들이 이달 초에 유작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활동가이기도 했다. 자립생활을 시작한 2009년부터 그녀는 광주에 내려가 10개월간 광주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중증장애인들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꾸려나갔고,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며 여러 모임을 이끌었다고 한다. 또 장애인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쟁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한 모양이다.


그녀는 또한 사람들의 연인이었다. 어린 시절 바깥에 나가보질 못해서 그 흔한 추억의 사진 한 장 없지만,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오가던 먼 길을 ‘소풍’으로 기억하고, 어머니가 덮어준 이불의 기억을 가슴의 제일 아랫목에 놓아두었던 사람, 사고를 당하기 전날에도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지갑을 고르고 늦은 밤 그에게 다정한 안부를 전했던 사람이었다.


▲고 김주영 활동가 생전 모습. ⓒ성동센터


그러니까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서 꼼짝없이 죽음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아야 했던 사람은 공부하는 학인이었고, 미디어 활동가이자 방송인이었다. 그리고 화가였으며 장애해방을 염원하는 사회운동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소중한 연인이었다. 무심코 신문에서 그녀의 죽음을 읽은 사람들은 단지 화마 앞에서 ‘별수 없었던’ ‘중증장애인’에 혀를 차고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무력했던 것은 ‘죽음’에서였지 ‘삶’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활동보조서비스를 포함해서 우리 사회가 그녀를 철저히 무장 해제시킨 뒤 대면시켰던 죽음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노제의 행렬을 따라가며 나는 매일 밤 그녀를 죽음 앞에 서게 했던 우리 사회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 분노했고, 그렇게 젊은 표정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뒤늦게 찾아보고 느낀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즉 그녀의 죽음은 정부를 고발하게 했지만 삶은 나 자신을 고발하게 했다.


이 기분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전태일 평전』 재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강연자로 초대받았을 때, 평전을 다시 읽은 나는 전태일의 모습이 과거 내 기억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 나는 전태일이 겪어야 했던 고초들, 그리고 끝내 그 몸에 불을 질러야만 했던 시대적 어둠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다시 읽은 전태일은 법전을 파고든 독학 연구자였고, 노동청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동료들을 조직하던 운동가였으며, 자전적 소설을 구상하던 소설가였고, 심지어 노동착취가 없는 모범업체를 설립하겠다며 사업계획서를 짜던 경영자였다. 요컨대 그는 노동자였지만 노동자에 좀처럼 머물지 않았던 그런 노동 자였다. 그는 시대가 ‘근로자’ 내지 ‘공돌이’라고 부르며 가두어두고자 했던 범주의 감옥을 일찌감치 벗어나 버렸다.

그는 살았을 때 이미 ‘해방된’ 사람이었다. 다른 노동자들의 비아냥거림도, 기업 관리자들과 국가 공안기관의 협박도 도저히 가두어둘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겪었던 고초들은 포기를 모르는 그의 용기와 자유의 반증이었다. 해방을 안락함과 혼동하는 사람들만이 운동가가 겪는 고초와 죽음의 이미지에 압도되어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는 안락하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다.

나는 김주영 씨가 걸어온 저 삶의 모든 시도들에서 그녀의 용기와 자유를 본다. 우리 사회가 부여한 ‘장애인’의 자리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장애인’이라는 자리는 그녀가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물었던 장소이고, 삶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을 쉬지 않고 증명해왔던 장소였을 뿐이다. 그녀는 장애인을 장애인 안에 가두는 문턱들 중 가장 악랄한 감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역사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은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협박 아래서, 그 두려움 아래서 노예적 삶을 강요받아왔다.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김주영 씨의 말이었다. 가만히 죽어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 곁을 떠난 사람이 결코 죽지 않게 남겨놓은 말이다. 그녀는 최소한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죽어지내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속 그녀의 비문에 고대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고 장애가 있으나 모든 현자들의 스승이었고, 누구도 그 앞에서 감히 자유를 뽐낼 수 없었던 그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적어두려 한다.

“이로스만큼 불쌍하고,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노예로 태어난, 나 에픽테토스는 신의 친구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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