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햇살도 누구의 것일 수 있었다

by 배추머리 posted May 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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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도 누구의 것일 수 있었다
2011.05.12 17:50 입력 | 2011.05.19 17:55 수정

길을 가다가 작은 꽃이 피었거나 다른 모양의 식물을 발견하면 멈춰서 살펴보게 되고 작은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는 생명의 신비에 그저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겸손해진다.

 

고개를 들어 연둣빛으로 대견하게 잎을 틔우는 생명을 보면 이름도 특성도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모르는 것이 많으면서 어디서 감히 무엇을 안다고 나설 수 있을까 싶어 더욱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베란다에 화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겨우내 방안에 있던 화분들을 베란다에 내놓으니 환한 햇살을 받아 녹색 잎들이 빛을 낸다. 햇살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양심이 없어요? 빛이 잘 드는 자리인데 그 자리는 우리 장독 둬야죠."

햇살이 눈부신 베란다에서 어머니는 애지중지 아끼는 항아리를 엉거주춤 들고 서 계신다. 그리고 외숙모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어머니 가슴에 꽂힌다.

 

어머니의 항아리에는 10여 년이 넘는 간장이 들어 있다. 오래오래 묵힌 간장은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의 반찬에만 간을 해주시던, 어머니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햇살 잘 들고 깨끗한 곳에 자리 잡은 항아리를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주변을 반질반질 닦으시고, 하늘빛을 살펴보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정성을 들이셨다. 그 항아리가 외숙모네 항아리들에 밀려 빛이 잘 들지 않는 베란다 구석 자리에 놓였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87년 동해에서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여기저기 몇 차례 이사하고 더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신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부산의 큰외삼촌 집으로 큰 트럭을 타고 기나 긴 시간을 달려갔다.

 

많고 많은 가재도구를 버리고 또 버렸다. 내가 좋아하던 책들과 썼던 글들 그리고 추억의 많은 흔적들 모두… 가난이란 이렇게 버리고 포기하고 추억의 흔적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최소화, 절대적으로 최소화되어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은 외숙모네 식구 넷과 함께 사는 아파트의 좁은 방 한 칸, 그곳이 우리 식구 넷이 함께 살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 방 안에 어머니는 구석구석에 빈틈없이 여러 가지를 꾸역꾸역 넣고 있었다. 마치 우리 현실을 이렇게 우리 가슴에 넣는 것처럼… 부산에서 첫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아파트라지만 4층짜리라 엘리베이터도 없고, 밖의 공기를 마시려면 무수한 계단으로 이어진 아래보다 하늘 가까운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빨랐다. 방안에만 있던 나를 밤에 가끔은 사촌 동생들이 데리고 4층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 보았던 무수한 집의 불빛들. 그 많은 집 중에 우리 집은 없었다. 사모님으로만 살다가 생전 처음 공장 식당에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는 저녁마다 눈물이셨다. 남성들의 반말과 무시하는 태도, 강도 높은 노동… 어머니의 월급이 우리 집 생활비였으니 그래도 일은 해야만 했다.

 

부산에서 일자리 찾으러 나가보지만 매일 무너지는 자존심에 술만 마시고 쓰러지는 아버지, 전학한 중학교에 다니며 학교도 집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막냇동생, 난 그저 무기력하게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종일 좁고 어두운 방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나날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주택의 월세방 한 칸을 마련해서 외숙모집을 나올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네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좁은 방이지만, 우리 방이 생겼다는 것이 좋았다. 우선 외숙모와 갈등하지 않아도 되고, 사촌들에게 미안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우리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어머니의 매일매일 눈물 나는 세월과 아버지의 좌절, 부산에서 살던 3년 동안 나의 삶에서 가장 최악의 고통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이 있었지만, 또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많은 추억도 있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밤을 새우며 놀아도 봤고, 제도 교육을 받지 못해 또래 친구가 없었는데, 또래 친구들도 생겼었다. 과연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조차 알 수 없었던 나에게서 사람들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있음도 알았다.

 

그렇게 부산에 대한 기억은 가장 아프고 힘들기도 하면서 또 가장 행복한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90년 어느 날 갑자기 인천의 해운 회사에서 아버지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이제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때야 멈췄다.

 

신림동에 월세방을 얻으려 다녔다. ‘식구가 몇이냐?’는 부동산중개인의 질문에 ‘여섯 식구’라고 하자 ‘애들을 왜 그렇게 많이 낳았냐’고 하더라며 어머니는 식구가 많아서 방을 못 얻겠다고 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좁은 계단을 다섯 개쯤 내려가는, 빛이 안 들어와서 낮에도 불을 켜둬야 하는 큰방 두 개를 얻었다. 나는 지하 창고 같은 곳에 방을 만들어서 임대를 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침에 모든 가족이 일하러 나가고 나면, 나는 형광등 불빛이 너무 싫은 방에서 온종일 지냈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지하수를 올려내는 발전기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를 온종일 들어야 하는 날은 두통이 심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자신감을 회복해 일을 하시고, 동생들도 모두 일을 하고 있었기에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2년 후, 계단 네 개를 올라가는 1층의 방 두 칸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셨다. 못 주무시고 밤을 새우며 울고 계셨다. 이제야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는 곰팡내와 발전기 소음으로 두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어머니는 울고 또 우셨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가장 행복하셨다. 하늘이 보이고 아침에 빛이 드는 그리고 새소리가 들리는 신림동 전셋집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 해 우리 어머니 소망이 이루어졌다. 여동생이 맞벌이를 해서 아들을 봐줘야 하기 에 방배동으로 작은 빌라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친정집을 도와주려고 항상 부지런 떨면서 일하는 둘째 여동생, 자리에 누워 본적 없이 공무원 시험공부 하고 공무원이 된 남동생, 알뜰하게 저축한 셋째 여동생, 아버지의 노력들 덕분에 집을 샀다.

 

5층짜리 빌라에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모두가 우리 집을 갖게 됐다는 기쁨에 흥겨울 때, 3층이면 난 어떻게 나갈 수 있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인데, 내 집은 아니었다. 단 몇십만 원이 아쉬울 때였고 언제나 그렇듯이 돈 앞에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기뻤지만, 가슴 한쪽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이사하고 몇 년 만인지 내 방이 생겼다. 한 평짜리 방, 혼자 잘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장식하고 챙기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러나 나는 옥탑의 공주처럼 한 번 나가려면 힘센 남자가 꼭 필요해야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쁨은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96년 12월 그렇게 좋아하시던 그 집에서 어머니는 3년을 살고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이제 막내 여동생만 결혼하지 않았고, 언젠가 나도 혼자 될 것을 대비해 독립생활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오래 살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난 혼자여야 한다는 현실이 닥쳤다.

 

97년이 되면서 너무나 많은 일이 나에게 닥쳐왔고, 독립생활을 위한 나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남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방배동 집을 팔아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하는데, 나는 남동생 집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이 독립할 때라는 생각은 드는데 대책은 없었다. 그래서 남동생에게 내가 '결혼한다'라고 생각하고 5백만 원을 달라고 했다. 그것과 전세자금 천만 원을 대출받아 독립을 결심했다.

 

정말 독립해서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해 아직 자신 없어 하던 장애여성 넷이서 고덕동에 방을 얻었다. 처음에 방 보러 왔을 때 도배지가 다 찢어져 시멘트가 보이고 어둡고 어설프기만 했다. 그리고 가재도구가 없어서 너무 넓은 방 두 칸, 두렵고 겁나는 방을 보내면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대출받은 것을 갚아나가기 위해 아끼고 아끼며 살았었다. 함께 살았던 세 명의 장애여성들 한 명씩 결혼하거나 독립해 떠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 그렇게 고덕동 집에서 십삼 년을 살았다.

 

베란다 가득히 햇살이 들면 생각한다. 엄마의 항아리… 자기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햇살도 맘껏 받을 수 없다. 태양은 마구 빛을 뿌려도, 인간세상에서 누군가는 그 빛도 평등하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무수한 지하 집들, 그곳은 여전히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도 어느 지하방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장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보조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장애인에게는 햇살도 평등하지 않다.

 

진심으로 사람이라면 안정적이고 빛 잘 드는 주거공간을 가질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지길 바란다. 나의 주거사는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나의 삶도 이 집에서 마무리되길 바란다. 누구에게나 빛이 있는 주거가 보장되었으면 좋겠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pyh2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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