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허물어진 집들, 붕괴된 삶의 기록들

by 베이비 posted Dec 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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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한 대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 '호수길' 골목을 말없이 응시한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할머니. 깔깔거리며 뛰노는 아이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거리를 헤매는 길고양이들. 동네 어디서나 들려오는 개들의 울음소리. 

 

말없이 골목의 일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어느 한적한 동네의 정경이 그렇듯 조용하며, 살아숨쉬는 생명력을 지닌 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호흡한다. 카메라는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 있는 듯 동네를 바라볼 뿐이다. 흔들리는 나뭇잎을,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기록한다.

 

호수길에 자리 잡은 무수히 많은 집.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수많은 집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모든 것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기나긴 기록을 파괴하는, 삶의 현장을 부수는 굴착기가 등장하자 화면 속의 정적도 동시에 붕괴한다.  

 

집들이 무너지자 동시에 집 안과 밖을 형성하던 존재들도 함께 사라진다. 이 붕괴는 카메라가 따라가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놓는다. 무수히 많은 것이 살아숨쉬던 시간과 공간을 단번에 허물어버린다. 누군가의 기억, 수없이 겹쳐졌던 발자국들,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허망하게 무너져내린다. 복원되지 못할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온 동네를 휩싸고 돈다.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존재의 소리가 그 속에 묻힌다.

 

이렇듯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전형적인 방법으로 화두를 던지지 않는다. 철저히 바라보게 한다. 이미 사라진 공간으로 관객을 이끌고 간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며 재개발이라는 담론 속에 파괴되는 집들의 운명이다. 그 집 속에서 삶을 연명하는 우리들의 운명이다.

 

집이 사라지자 모든 구성원이 홀연히 사라진다. 우리가 살아서 지나다닌 흔적들. 과거의 시간들이 동시에 파괴된다. 카메라는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그리고 동네의 운명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듯 길 위에서 죽은 고양이를 비춘다.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은 허물어진 건축물의 잔해 속에 함께 무너져버린 삶의 기록을 바라본다. 숨결이 끊어진 채 먼지 속에 침몰한 시간들은 허망하게 흩어져 잡을 수 없다.

 

▲'호수길'의 한 장면.



김가영 기자 chara@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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