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던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장애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문제다!’ 그 자체로 충격이었습니다. 동네를 거닐다 보면 나를 향하는 눈빛들이 따갑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러한 눈빛만 극복하면 그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장애인들의 삶은 교육, 노동, 기타 사회활동 전반에서 배제됐습니다. 특수학교를 굳이 따로 지을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다가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차별의 시작입니다.
장애인들의 삶은 비참합니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공통분모인 교육, 소득, 주거는 물론 법률, 행정등 사회서비스의 기회는 장애인에게 아직 멀게만 느껴집니다.
장애인운동이 이 소외에 땜질을 했습니다. 저상버스, 장애인콜택시,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생겨났고, 활동지원서비스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도 만들어졌습니다만 그것은 극히 최소한의 것일 뿐입니다. 시/민/되/기, 딱 거기까지 해온 거지요. 그러나 법이 만들어지고 제도가 생겼어도 삶 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쉰내는 감출 길이 없어 보입니다.
당장 활동지원제도만 보더라도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시간은 극히 적습니다. 한 달 평균 72시간, 하루 2시간이 전부입니다. 장애인소득보장정책이라 할 수 있는 장애인연금은 장애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한 정부의 보전책일 뿐입니다. 현장에서의 실제 비용을 평균해보면 한 달 30만 원 수준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정부의 기만일 뿐입니다. 한국의 복지비용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닐뿐더러, 그 비용들은 ‘복지비용’이 아닙니다. 지극히 낮은 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들입니다.
저는 여섯 살 된 딸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딸아이가 왜 아빠는 이상하게 걷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모습이 다 다르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썩 시원치 않더군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혹시나 기가 죽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이가 다닐 학교에 가끔 찾아가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도 싶고, 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 마음껏 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떨고 싶습니다.
정당마다 선거를 맞아 다양한 복지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서로 싸웁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과연 이러한 논쟁 속에 장애인들의 삶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장애인, 노인, 여성, 아동…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 분류되는 이들이 이 논쟁에서 수혜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간 것입니까.
'말뿐인 장애복지 법조항마저 우리의 생존을 비웃고 있다. 노동으로 일어설 기회마저 빼앗긴 동지여~' 장애해방가의 이 소절은 그동안 몇몇 장애인 관련법이 만들어진 지금에도 유효합니다. 아니, 귓전에 와 닿음이 더욱 떨리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중심이 아닌 성과 중심의 국회 시스템 속에서 장애인의 삶이 유린당해 온 것입니다.
저는 진보신당을 지지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자 합니다. 경쟁과 효율이 아닌 진정 인간에 대한 예의를 논할 수 있는, 그래서 그 속에 교육권, 노동권을 포함해 장애인이 이 사회에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제반의 권리들을 말하는 일에 함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