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다룬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를 출간한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이 '점거와 총파업 - 장애인운동으로부터'라는 주제로 비마이너의 세 번째 기획강좌를 진행했다.
고 연구원은 현장에서 목격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소개한 뒤 장애가 있는 자식의 수급권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아버지와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자기 성원과 함께 살기를 배신한 국가에 대해 마땅히 응징할 때가 왔다고 지적했다.
과연 응징은 가능할까? 고 연구원은 지난해 9월경 미국 뉴욕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당시 참여자들이 체제에 대해 모든 것을 요구한 것은 결국 역사적으로 체제에 대한 중단을 요구했던 총파업의 정신과 같다고 설명했다.
즉, 비타협적인 급진성으로 체제를 중단시키려는 노력만이 함께 살기를 배신하고 소수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체제에 비상브레이크를 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어 고 연구원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노동조합의 몫으로만 받아들여졌던 총파업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거부하는 신체를 가진 장애인처럼 체제의 한계를 폭로하고 체제의 중단을 가장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들로부터 총파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은 노들장애인야학 배움터에서 중증장애인 활동가 등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5일 저녁 7시부터 3시간 동안 진행했다.
뉴욕 민중들, 점거를 통해 삼켜야 했던 말들을 내뱉다
이날 강연에서 고 연구원은 "당시 뉴욕에서 점거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때에는 솔직히 이 정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라면서 "이는 나만이 아니라 점거운동을 준비한 당사자들 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라고 전했다.
고 연구원이 런던에서 일어난 시위 이야기를 하며, 미국의 한 학자에게 뉴욕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냐고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학자는 런던의 10배가 넘는 뉴욕의 가공할 경찰력과 뉴욕인들의 소비주의, 개인주의, 인종주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첫날 행진이 끝나고 경찰이 점거 집회 예정장소를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참가자들이 주코티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누군가 '우리 모두 여기에서 이야기하자', '여기에서 제너럴 에셈블리(총회)를 열자'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고 연구원은 "집을 잃은 이야기, 건강보험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이야기, 대학등록금이 너무 높아 학업을 접게 된 이야기가 며칠 동안 이어졌다"라면서 "비극에 비극이, 슬픔에 슬픔이, 울분에 울분이 더해졌고 서로 다른 사연들이었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쉽게 공감했다"라고 회상했다.
고 연구원은 "점거 초기에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을 한참 말하던 한 여성이 점거 제안자 중 한 사람에게 다가와 '자기 말을 들어줘서 고맙다', '점거를 해줘서 고맙다'라면서 꼭 껴안은 모습을 보며 점거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깨달았다"라면서 "그것은 안으로 삼켜야 했던 말들, 누구보다도 민중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말들을 직접 내뱉을 장소를 열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끊은 아버지와 투사가 된 어머니
이어 고 연구원은 지난 2010년 10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일용직 아버지가 부양의무제로 말미암아 아들이 수급권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이 사건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고 연구원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했던 아버지, 아니 그 이전에 한 아들이 '장애인'으로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것, 그 가장 큰 책임과 의무는 공동체인 국가에 있으며 국가가 1차 부양의무자였다"라면서 "이 사건은 국가의 자기 성원에 대한 '배신', '함께 산다'라는 말에 대한 배신"이라고 지적했다.
고 연구원은 "경제 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원시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성원이 모두 굶어 죽을 수는 있어도 개인이 굶어 죽는 일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존재해 혼자 살지 않고 함께 살았기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부재와 무책임으로 사람을 죽인 존재가 마치 혜택을 제공하는 천사나 구세주인 양 행세하는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고 연구원은 '아이가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발달장애인 자식을 둔 어머니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장애인들, 그리고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지금 이 땅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거나 투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고 연구원은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 비단 장애인들뿐만 아니라 민중 전체가 '집에서 쫓겨난 삶', '교육받지 못한 삶',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삶', '고용불안은커녕 아예 직업조차 갖지 못했던 삶',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삶' 등 그동안 장애민중들이 살아오고 투쟁을 시작했던 곳으로 추방되고 밀려나고 있다"라면서 "장애인운동이 출발해야 했던 곳에 전체 민중 운동이 도달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고 연구원은 "이는 한국만 아니라 월스트리트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점거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세계 민중들이 경험하는 공통된 현실"이라면서 "체제에 맞춰가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체제 안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도 발견되지 않을 때, 단지 체제 안에서는 추방된 자로서만 재생산된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체제의 불가능성, 체제로부터의 해방, 체제 자체의 추방을 선언할 때"라고 강조했다.
국가의 배신에 대해 마땅히 응징해야
고 연구원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에서 참여자들은 공동체를 이뤄 그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지배적 가치체계를 전복하고 삶의 기본 유형을 교체하는 작업을 수행했다"라면서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이주노동자에게 등록 여부를 묻지도, 인종을 묻지도, 성적지향을 묻지도 않았고 어떤 선험적 자격이나 조건 없이 서로 돌보며 연대하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고 연구원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물리적 장소를 빼앗긴 직후 화가 난 뉴욕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으며, 꽤 많은 시민들이 정부에 불복종을 표시하며 길거리로 내려와 '나를 잡아가라'며 경찰에 스스로 연행됐다"라면서 "국가의 배신에 대해 정부가 우리를 버렸으므로 우리도 정부를 버린다는 생각을 할 때만이, 우리를 탄압하고 통치하는 정부로서의 거번먼트(goverment, 통합의 방식)가 아니라 우리 삶을 가꾸는 거번먼트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연구원은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태곳적 물음을 반복한다고 해서 어떤 과거의 원시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면서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그 물음을 더 고차적이고 새로운 형식으로 재발명해야 하며,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철저히 얼굴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모든 첨단의 소통을 무기들을 사용해야 하고, '함께 함'을 가능케 할 새로운 정서를 생산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총파업의 요구는 체제로부터 가장 고통 받는 자들에게서 나온다
고 연구원은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국가의 배신을 철저히 사고함으로써만 국가 권력에 매달려서, 특히 선거를 통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면서 "아울러 국가뿐만 아니라 대학, 정당, 언론, 심지어 모든 정체성들, 우리의 의식을 점령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수용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고 연구원은 "유례가 없다고 말했던 것, 예산이 없다고 말했던 것, 제도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 원칙상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따져 묻기를 시작해야 하며, 그때만이 우리는 불가능이 생각만큼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며 "사실 이 모든 물음이 응집된 것이 지금 제기되는 총파업에 대한 요구"이라고 설명했다.
고 연구원은 "대학등록금을 낮추라는 요구, 시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요구, 저상버스를 도입하라는 요구 등 모든 요구가 똑같이 절박하고 똑같이 긴요하며, 이것은 하나의 정책이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총파업의 요구"라면서 "모든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 체제를 바꾸라는 딱 하나만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는 개별 정책이나 제도로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 연구원은 "이 점에서 총파업은 주어진 체제 안에서 그리고 개별 공장 안에서 노동 조건이나 지위의 인상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파업과 달리 체제 안에서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급부를 갖고 있지 않다"라면서 "따라서 총파업에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급진성이 중요하며, 총파업의 요구는 체제로부터 가장 고통 받는 자들, 누구보다 체제의 중단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서 나온다"라고 설명했다.
고 연구원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총파업에 대한 요구는 노동조합의 몫으로 받아들여 왔지만, 총파업은 오히려 조합적 이해의 극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요구하기 이전에 노동조합에 요구된 것"이라며 "또한 우리는 현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았기에 이 체제의 중단을 누구보다 갈망하는 장애인들의 참여가 없는 비장애인들의 파업은 총파업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어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가자는 "일하는 노동자는 일을 멈추는 것으로 파업할 수 있지만, 살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활동가들은 어떻게 파업에 참여해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고 연구원은 "총파업은 단순히 '우리 쉬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멈추자는 것"이라며 "따라서 총파업 했으니 저상버스를 이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저상버스를 100% 도입할 때까지 비타협적으로 못살게 구는 것이 '이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타협은 없다'라는 총파업 정신에 맞는 것"이라고 답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트위터에 실시간으로 강연 내용을 올렸더니 '아나키스트가 되려면 내공이 필요하군'이라는 답글을 올라왔는데 총파업과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의 관계를 알고 싶다"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고 연구원은 "시장주의라고 볼 수 있는 국가최소주의부터 좌파적 아나키즘까지 아나키즘은 스펙트럼이 넓어 아나키즘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라면서 "하지만 확실한 것은 국가를 배신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바꿀 수 없기에, 국가를 믿는 사람조차도 국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 바깥에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답했다.
홍권호 기자 shuita@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