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17회 서울인권영화제가 ‘세상에 사람으로 살다’라는 슬로건으로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나흘간 청계광장에서 열린다. 강정, 용산, 그리고 재능농성장과 쌍용차 분향소…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투쟁장소들. 그들은 왜 그곳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걸까. 개발의 이름으로, 이윤의 이름으로 삶 터를, 일터를 빼앗으려는 국가와 자본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터전이라 함은 단지 물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관계, 역사의 뿌리가 고스란히 뻗어 있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대체될 수 없고, 쉽게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장소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수많은 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로 역사를 써나갈 장소를 찾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상영관을 대관할 수 없어 거리상영 5년째, 서울인권영화제가 인권영화관을 세우려는 거리는 어떤 의미일까. 장소를 지키고,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세상에 사람으로 살기 위한 외침이다. 그 외침을 들어보자. _ 인권오름 |
살만한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내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쫓겨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나의 존재와 관계, 경험과 역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마도 그것이 삶의 터전을 일구면서 누구나 바라는 마음일 테다. 그 삶의 터전을, 자본과 기득권이 팽창하기 위한 근거지로 삼는 공간에 대비해 장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소성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돈이지만, 그 장소의 의미를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명백하다.
장애인과 성소수자는 왜 장소를 허락받지 못했나. 왜 그 오랜 역사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져’ 살아야 했나. 왜 이들의 얼굴은 공간의 격을 떨어뜨리고, 추문을 일으키는 존재의 상징이 되어왔나. 올해 인권영화제를 계기로 다시 이 질문 앞에 섰지만 '장소와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향해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 말에 그간의 권력, 자본, 차별, 빈곤, 주거, 의사결정권, 정체성 등에 대해 고민해왔던 운동과 담론을 재조직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아보고 싶은 바람을 담아본다.
뿌리 없는 존재의 조건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은 자본의 효율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 동안 시설에 갇히거나 방구석에 처박혀야 했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파업’ 상태였다. 장애인들도 여러분과 함께 거리의 파업을 통해 자본의 속도에 맞서고 체제를 바꾸는 투쟁에 함께할 것이다.” 이번 5.1. 총파업 난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씨가 한 발언이다. 자본의 속도에 맞서고 체제를 바꾸는 투쟁을 호소하는 것이었겠지만, 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삶이 말하는 위치는 좀 다른 ‘파업 상태’를 지속하게 했던 방구석이나 시설이었다.
![]() ▲장애인 이동권 투쟁 영화 <버스를 타자>의 한 장면. |
성소수자 중에서 태어날 때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가 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법원에서 요구하는 성전환 수술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로 신분을 정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자신을 확인해주지 못하는 주민번호 뒷자리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 노동의 공간에서 존재가 거절당하고, 신분확인을 요구하는 병원과 은행, 공공기관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 존재를 검열하고 검증한다. 생활기반을 만드는 방법이 제한되다 보니 삶의 장소 또한 그렇게 제한된다.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우, 그 집단에게 열려 있다고 느끼는 곳이 특정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유흥업소이다. 트랜스젠더 남성의 경우, 항상 인력이 부족해서 신분증을 거의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거나 불안정한 곳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한 노동을 하기에 본인이 어렵다고 느끼거나 그러한 업종에서 요구하는 몸에 맞지 않는 이들은 다시 한 번 제외되지만.
어떤 이들의 삶이 상상이 되지 않는 것, 공식적으로 재현될 수 없는 것, 사회가 바라는 방식으로만 호명되는 것. 이런 조건에 놓인 이들은 장소를 가지지 못한, 뿌리 없는 존재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것을 ‘자본’이나 ‘국가’로만 설명하면 그 사이에, 그 주변의 것들이 많이 사라지는 느낌이다(물론 그러한 설명이 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그 삶이 놓인 자리의 장소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장애인을,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최종권력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덩어리’를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덩어리’에 함께 섞여 있을 개인의 역사와 선택, 그 삶의 욕구를 잘 이해하고 가능성의 틈새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수자들의 뿌리 놓을 곳을 이미 제한적으로 허용된 곳, 정상가족을 특권화하는 기존의 가족제도, 협소한 복지제도 등 기존의 틀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으나 마땅히 가져야 하는 새로운 방식의 장소를 찾아 나가야 할 것 같다.
투쟁을 통해서 돌아갈 곳은 없지만
![]()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의 2011년 12월 서울시의회 농성. |
아주 협소한 의미의 의사결정 과정인 선거를 보자. 많은 노동자가 임시휴무를 보장받지 못해서 참정권을 침해당한다. 삶의 조건이 열악할수록, 삶에 대한 결정권이 확보되지 못할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이미 많이 밝혀진 바와 같이 중증장애인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는 투표소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거의 공개적으로 신분확인을 해야 하는 투표장에 가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삶의 터전을 가꿀 수 있고, 그것을 위해서 존재를 드러내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파편화된 요구를 가진 이해당사자가 아니라 그 삶의 ‘덩어리’째 세상과 관계맺기가 가능하다면, 차별과 억압에 대해 대항하는 방법이 좀 더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투쟁의 거점이 일터, 학교, 집터가 아니라 항상 길거리가 되는 장애인의 투쟁이 가진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작년 말, 처음으로 공적인 공간을 농성장소로 만들어내었던 성소수자들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떠올린다.
투쟁을 통해서 돌아갈 곳은 없지만 공공장소를 활보하고, 거리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우리의 요구를 발언하고, 사람으로 살아냄으로써 공적인 공간의 성격을 폭로하고 변화시켜나가는 노력이 한동안 더 진행될 것 같다. 그래서 장애인과 성소수자(로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이들)들의 거점이 사회 안에서 생겨나고 그곳이 이들의 경험과 역사가 담긴 중요한 장소로 생성되길 바란다. 그 장소를 많은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존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된다.
5월 26일(토) 장애_소수자의 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소수자들의 긴 싸움. 두려움에서 벗어난 당당한 울림은 제도를 바꾸고, 현실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더 질기고, 더 단단하게 이어질 그들의 투쟁에 주목합니다.
12:00 <기억으로 묶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
13:10 엘렌의 귀를 통해서 Through Ellen's Ears
13:50 두 번째 계절 Second Season
15:00 둥근 장막 Round Outer Layer
16:30 새로운 학교 - 학생인권 이등변삼각형의 빗변길이는? A New School - The Hypotenuse Length of the Students Rights Isosceles Triangle is?
18:30 작은 천국 Little Heaven
19:50 카사블랑카의 여자들 I am a Woman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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