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군 제대 후 밴드를 했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나이트클럽 상당지역을 돌아다녔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엔 낙원상가 2층의 악기점에서 소위 메니지먼트를 해줬다. 즉 밴드와 업소를 연결해주고 첫 달 페이의 10%를 메니지먼트가 갖는, 뭐 그런 조건이다.
84년 봄 우리 밴드는 속리산관광호텔 클럽 ‘파노라마’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속리산은 나름 유명한 휴양지였다. 신혼여행도 적잖이 왔었고 신혼부부들은 밤에 나이트클럽에 올라와서 좀 놀다가 양주와 안주 등 주문한 비싼 음식을 많이 남겨놓고 그냥 룸으로 가기 다반사였다. 우리 밴드는 신혼여행 쌍이 나이트클럽에 입장하는 날은 일 끝내고 그들이 남긴 술과 안주(후까시라고 불렀다)로 배불리 회식하는 날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린 신혼여행객이 입장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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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린 호텔주변에 널린 맛집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받는 게런티 및 살림 규모로는 어림도 없었다. 멤버 대부분이 시골에 돈을 부쳐야 하는 가장이어서 라면이나 국수로 끼니 때우기 바빴기에, 그야말로 가끔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나 한 번씩 호텔 주변의 맛 난 음식점을 가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멤버의 친구들이 놀러 와서 우리 밴드는 그 친구들과 함께 호텔 건물 1층에 입주한 더덕구이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상에나 더덕 크기가 정말 굵은 칡뿌리만 하다. 이를 망치로 때려 뭉개서 양념 발라 숯불에 굽는다. 요리과정을 지켜보며 상 차린 더덕을 먹는 맛도 맛이지만 이게 비싸기도 엄청 비쌌다. 문제는 여기부터~!
더덕구이를 요리하던 직원이 우릴 무지하게 환대하는 거다. 자기 꿈이 카수라며 언제 시간 되면 한 번 호텔 9층 파노라마 클럽에 올라오겠단다. 밤 12시부터 하는 오부리 타임에 노래를 부를 테니 자신의 노래실력을 평가해달란다. 뭐, 오부리 수익도 있고 하니 당연히 오케이했다.('오부리'는 밴드가 돈 받고 손님 노래반주 해주는 일 정도 생각하시면 될 듯)
며칠 뒤 그 더덕요리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오부리 타임. 컥, 웬걸… 음정, 비브라토 나름 멋을 내며 부르기는 하는데 문제는 박자다. 박자를 마구 넘긴다. 우리 밴드야 뭐 오부리 신물 나게 해봤고 돈 낸 손님이 박자를 끌던 당기던 음정이 가던 말던 부르는 왕 손님의 노래 흐름에 착착 맞춰줘 왔기에(그래야 기분 좋아 2절까지 부르고 우린 천원 더 번다) 뭐, 문제는 없다만서두…
암튼 노랠 마치고 우리 밴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이 친구, 자기 노래가 어땠냐고 묻는다. 우린 솔직히 얘기해줬다. 박자가 문제라고… 연습할 거란다. 노래 틀어놓고 열심히 연습하라고 해줬고 나름 리듬에 대해서도 좀 가르쳐줬다. 그리고 어느 날 점심쯤 이 친구 우릴 더덕집으로 초대한다. 한턱 쏘겠단다. 아싸가오리~! 우린 이 친구가 일하는 더덕구이집으로 갔고 그날 그 비싼 더덕구이를 그야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친구 그간 나름 연습한 실력을 자랑하려는지 나이트클럽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오부리타임에 3~4곡을 연짱으로 뽐낸다. 우린 열심히 맞춰줬다. 하지만 또 박자, 박자…… 이거 음치보다 박치가 더 환장한다.ㅎㅎ 일 끝나고 다시 자신을 평가해달라는 이 친구에게 우린 서로 눈치를 보며 이상하게 머뭇거리며 말을 아낀다. 왜냐구?ㅠㅠ. 더덕, 더덕… 굴러온 더덕인데… 이 친구 기분 좀 잘 맞춰주면 속리산에서 일하는 동안 더덕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을 텐데… 우린 미리 짜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와 죽인다’. ‘가수 뺨친다’…라고 해버렸다. 헉, 그놈의 더덕.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났고 이 친구 요즘 왜 안 보이지…하는 무렵 어느 날 밤 다시 그가 나타났다. 오잉~?? 이 성질 급한 속리산 카수는 아예 반짝이 옷까지 챙겨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짤짤이 탬버린에 빽구두까지 갖춘 완전무장으로 등장한 거였다. ‘가수 뺨친다’는 우리의 아부성 말에 그는 감동 먹어버린 거였다. 이리 찬란한 복장으로 그는 다시 오부리타임에 섰고 역시나 엇박자의 마술이다. 하지만 몸동작, 무대 매너만큼은 그야말로 쥑인다. 그간 누구한테 사사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더덕에 굶주린 우리와 그는 요상한 파트너가 되어 매일 밤무대에서 만났고, 그 친구는 날이 가도 그 엇박의 마술은 변치 않았다. 그렇게 그는 우리 팀 오부리 전문카수가 되어갔고 우린 뭐, 손해 볼 건 없었다. 그의 노래 역시 돈 받고 반주해주는 터라 수익도 늘고… 더군다나 우리의 더덕사랑을 눈치챈 그 임시멤버는 밴드 대기실로 밤마다 더덕구이를 실어 날랐고 우린 덕분에 라면으로 때우는 새벽 간식 시간에 기막힌 더덕 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몇 달이 또 지나고 클럽과의 계약기간도 끝나 우린 이 속리산카수와 애틋하게(?) 헤어져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또 몇 달…
어느 날 낙원 악기점에서 숙소로 전화가 왔다. 어떤 남자가수가 우리 밴드 얘길 하며 속리산에서 같이 일했던 싱어라면서 우릴 찾는단다. 또 일거리도 찾고 있단다. 당시 속리산나이트 때의 우리팀 싱어는 여자였는데(사진참조), 누구지? 누굴까? 하다가 아…… 그 속리산 카수~~ 앗, 더덕~!!!
낙원에 갈 때마다 우린 혹시 그를 만날까 봐 피해다녔다. 왜? 원죄가 있으니. 속리산에서 그는 꼭 가수가 되고 말 거라고 다짐다짐 했었고 우린 옆에서 살살 바람까지 넣지 않았던가? 혹시 정말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하면… 으악~ 안돼~ 뭐 이런 심정이었다. 해서 낙원악기사에 갈 때도 상가 밖에서 공중전화로 그가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악기사에 들렀다.
하지만 이도 잠시, 어느 날 우린 낙원상가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멀리서 우릴 발견하고 달려드는 속리산카수를 뻘쭘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이~ 마스터님~ 나 완전히 상경했습니다~ 나도 이제 식당일 때려치우고 이참에 완전히 직업을 바꿨습니다~~" 으악~~ 더덕 때문이야. 그놈의 더덕 때문에 이렇게 우린 꼬이는 거얏! 또 한 인생 덤으로 망치는 거고. 어쩌지?? 우린 정말 당혹스러웠다. 다시 돌릴 수도 없고…
그 후 몇 달간 우린 속리산카수와 동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함께 기거하는 서울역 건너 남산 쪽방으로 그가 아예 짐 싸서 온 거다. 자신도 집세를 나누겠단다. 우리가 일자리 찾으면 자신을 꼭 써 달란다. 노래실력도 엄청 좋아졌다고 자랑까지 하면서… 물론 뻥.
당시 종로 낙지골목에는 중저가 나이트클럽인 ‘세시봉 나이트’라는 데가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몇 달 임시로 일하게 되었고 그동안 우린 이 속리산카수를 원죄에 대해 속죄하는 고해성사의 맘으로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뭐 그럴듯하게 붙여 소개하면서…ㅎ 역시 곡마다 빠짐없이 넘기는 박자, 이 엄청난 엇박의 달인… 그가 부리는 마술대로 박자를 따라가느라 우린 무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뺑이쳤고, 일 끝나고 내려와서는 지배인에게 역시나 쿠사리를 된통 먹곤 했다. 걔좀 무대에 올리지 말라구…
암튼 원죄의 아들 속리산카수 덕분에 우리팀의 몸값은 자꾸자꾸 떨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일자리는커녕 낙원에서 마구리(엉터리)밴드로 낙인 찍히기 딱이었다. 결국 우린 몰래몰래 만나서 대책을 논의했고, 일단 자연스럽게 일하다가 날 잡아서 튀기로 했다. 분위기를 어찌 눈치챘는지 속리산카수는 도대체가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그날 카수가 잠깐 외출했고 우린 짐을 대충 챙겨서 냅다 튀었다. 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로? 미리 알아봐 둔 일자리, 태백 옆 탄광촌 고한으로…
밴드의 생명은 실력과 음악의 일체감이다. 기타를 아무리 잘 쳐도 드럼이 헤매면 마구리 팀이 된다. 그 팀의 실력은 연주에서 가장 뒤처지는 맴버를 기준으로 하향 평준화 되버리는 거다. 게런티 역시 그리 정해지다 보니 성원의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인간적으로 참 야박한 짓이지만 우린 어쩔 수 없었다. 우리 팀 사활이 걸린 문제 아니겠는가? 하기에 낙원상가에선 그만그만한 실력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팀을 구성하는거다. 여기서 자신의 실력이 늘면 또 더 높은 팀으로 떠나는 거고…
암튼, 고한에서 일하면서 낙원상가로 가끔 전화를 했다. 혹시 우리가 여기 와 있다는 걸 그 친구가 알면 안되니까, 동태도 살필 겸 또 보안도 당부할 겸. 그리고 몇 달이 흐른 후에 그 친구가 카수생활을 정리하고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스탠드바 공연 사회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 잘됐다. 암튼 그의 재 업종변경으로 그는 낙원상가에 올 일이 없어졌고, 고맙게스리 우린 다시는 그를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뭐 옛날 얘기 끝이다.^^
밴드도 일종의 전문업종이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답게 말을 조심해야 한다. 뭐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과거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에서 소위 국과수 전문가, 법조인들의 더덕스런 판결 및 인혁당사건 등 소위 공안사건에서 보듯 이들의 더덕구이틱한 판결들은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또 죄 없는 목숨을 죽이기까지 하잖는가? 또 요즘 자본의 이익에 맞춰 충성하는 사이비 핵전문가들의 더덕구이만도 못한 도라지구이스런 자문에 의해 고리 1호기는 수백만의 목숨을 저당잡은 시한폭탄이 되어 우리 목숨을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그 때 우리가 그놈의 더덕구이 유혹을 뿌리치고 속리산카수에게 ‘당신의 노래는 문제가 있다, 결코 가수라는 직업이 맞지 않다.’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얘기해줬다면 그도 소위 전문가의 가짜 의견을 반영한 직업전환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 험악한 밤업소를 돌며 온갖 수모를 안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추억이 돼버린 30년이 다 된 우스개 얘기다. 우리 노동문화예술 진영에서는 결코 제2,3의 속리산 카수가 없길, 생기지 않길 바라본다.
김호철의 노래세상 자본의 목적에 의해 기획된 노래와 문화가 온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울려 퍼져 민중들의 가슴속에 한이 되고 힘이 되고 밥이 되는 노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시민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표곡:파업가, 단결투쟁가, 민중의 노래, 들불의 노래, 장애해방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
김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