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역에 장애인들이 어눌한 말투로 또는 작은 소리로, 경상도 말로 그리고 전라도 말로 참 다양한 방식으로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서명하고 가세요. 장애등급제 폐지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던 한 시민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본다. ‘장애등급제’라는 말이 낯선가 보다. 장애인의 삶에 굴레인 ‘장애등급제’가 비장애인에게는 생소한 말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장애인은 지구 밖에서 온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괴리감을 느낀다.
지금, 장애인은 그들에게 사회가 찍어준 노예의 낙인 등급제를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다. 장애인의 저항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9월 19일,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에 또 한 분의 열사를 생각한다. 그분은 거대한 혁명을 꿈꾸지도 않았고,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으며 큰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단 하나의 소망이자 소박하고 작은 바람 하나, 액세서리를 만들어 납품하고 자기가 일한 만큼만 받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그리고 아내와 다섯 살 아들과 함께 따뜻한 밥상 마주 앉아 먹을 수 있는 것, 아내에게 아들에게 당당한 가장이 되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을 소망했던 김순석 열사.
![]() ▲김순석 열사의 자결 소식이 실린 당시
신문. |
장애가 있는 사람은 소박한 꿈조차 꿀 수가 없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치하의 1984년 당시 ‘장애인 편의시설’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서울의 거리는 온통 턱과 턱으로 거대한 차별의 성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리라. 장애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감옥의 자물쇠가 되어… 김순석 열사는 서울시장에게 다섯장짜리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서 저항하셨다. 열사가 남대문시장에 납품을 위해 집 앞을 나설 때마다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지… 몇 차례 결심하고 문을 나서서 또 얼마나 매 순간 불안과 초조로 휠체어 바퀴를 힘겹게 밀고 다니셨을지…
김순석 열사의 피울음은 그가 남긴 유서에서 그 생생한 좌절이 보인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열사는 절절한 외침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이 사회에 장애인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저항을 하셨다.
오늘날 일부 비장애인들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에게 말한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그러나 28년 전 김순석 열사가 죽음으로써 외쳤던 저항이 지금 끝났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은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보다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는가를 찾아야 하고 때로는 계단과 턱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어 굶어야 한다. 28년 동안 비장애인이 풍요로워진 만큼 장애인도 좋아졌는지 따져보면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 심해졌는지도 모른다.
김순석 열사는 여전히 유서를 수없이 쓰고 계신다. 장애등급제로 저울 위에 올려져 있는 지금의 장애인도 열사가 그랬던 것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어둡고 좌절스럽다. 활동보조 시간과 장애수당과 수급 급여까지 모두 장애등급제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김순석 열사는 오늘도 장애등급제라는 유서를 쓰고 계신다. 열사의 유서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도 좌절 앞에서 유서 쓰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더욱 열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9월의 바람과 하늘과 코스모스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휠체어 바퀴를 구르며 거리에 나서는 김순석 열사를 상상해 본다.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 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