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난해 5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의 문제점을 짚기 위해 만났던 이종부(가명, 73살, 대구 서구) 씨였다. 2011년 이씨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법에 명시된 부양의무자라는 굴레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이씨는 다시 기초생활수급비를 신청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큰아들에게 보장비용징수를 통해 수급자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지난해 5월 이씨를 만나고 난 후 서너 달 뒤, 그의 수급비 신청을 도와주었던 인권운동연대 활동가로부터 “‘차마 아들에게 그럴 순 없을 것 같다’고 신청을 취소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지냈다.
기자에게 전화를 건 이씨는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됐다. 아들에게 다시 보장비용징수를 할 것”이라며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까지 부인 몫의 연금을 포함해 57만 원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올해부터는 참전명예수당이 3만 원 올라 모두 60만 원을 국가로부터 받는다. 고령에 건강이 좋지 못한 이들 부부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월세 20만 원을 제외한 40만 원으로 이들은 한 달을 살아내야 한다.
일흔을 넘긴 고령의 이씨는 허리, 목 등의 디스크를 포함해 이런저런 건강상의 이유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병원을 찾는다. 올해 66살인 부인은 지난해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기침을 달고 산다.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면 의료혜택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씨가 수급자가 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이씨가 기초수급자가 되기 위해 거쳐 온 과정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부모와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 가난의 굴레를 덧씌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 지난해 5월 29일 기초수급을 신청하려 하는 한 남성이 반빈곤네트워크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초수급자
실태조사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 뉴스민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5조 수급권자의 범위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능력이 없어 부양받을 수
없는 사람”
기초생활보장법 제5조는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받을 수 없는 사람”을 수급권자로 인정한다. 2011년 이씨는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했다.
이씨에게는 혼기를 훌쩍 넘긴 채 혼자 사는 아들 둘과 이혼한 딸이 있다. 이 중 법이 부양의무자로 지목한 사람은 이씨의 큰아들이다.
이씨의 큰아들은 경기도 성남에서 건설현장 기능공으로 일하고 있다. 관할 구청은 혼자 사는 아들의 월 소득이 350만 원 가량으로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350만 원이면 일당 15만 원 기능공이 23일은 일해야 받을 수 있다.
하루 벌이를 하는 기능공들의 현실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나 날이 추운 겨울에는 일하는 날이 훨씬 줄고 임금도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고 날이 추워지지 않는 전산망 속에선 언제나 350만 원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46조 비용의 징수
“부양능력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을 경우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 징수”
1년 뒤, 우연히 뉴스를 통해 가족 간 왕래가 없고, 부양의무자가 실제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본 이씨는 이번에는 아들이 자신을 부양하지 않고 있다며 다시 수급비를 신청했다.
기초생활보장법 제46조는 “수급자에게 부양능력을 갖춘 부양의무자가 있음이 확인된 경우 보장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징수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의문이 생긴다. 능력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는데 수급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 부양의무자 기준의 적용 (자료출처 :
보건복지부) |
보건복지부의 ‘2013년 국민기초생활보장사업안내’를 보면 부양의무자가 △병역법에 따라 징집, 소집 △국회이주자 △교도소, 구치소 등에 수용 △보장시설수급자 △행방불명자 △부양을 거부하거나 기피 △기타 시장, 군수, 구청장이 확인하여 부양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우 수급자가 될 수 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기준은 부양의무자가 '부양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다.
복지부는 △시장, 군수, 구청장이 부양받지 못하고 있다고 인정한 경우 △실질적인 가족관계 단절상태 또는 기타 이에 준하는 이유로 소명된 경우 △양자, 양부모 등 혈연관계가 아님을 이유로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 수급자가 될 수 있다고 정해놓았다.
이 경우 국가는 수급 신청자를 기초수급자로 선정하고 비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양의무자로부터 징수할 수 있다.
아들, “사업 실패, 빚 이자 때문에 부양 어려워”
구청, “실질적인 가족관계 단절이라 볼 수
없어”
인권운동연대, “지방생활보장위원회서 심의해야”
법에 따라 이씨는 기초수급자가 되기 위해 아들의 부양 거부 또는 부양 기피를 증명해야 한다. 이씨는 1월 24일 다시 한번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지난 4일 실태조사를 나온 통합조사팀 직원은 “부양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며 “실제적인 가족단절로 보기 어려워 수급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조사팀 직원의 말처럼 이씨의 아들이 부양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설, 추석 명절에는 적으나마 용돈을 보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명절에 조금씩 받는 용돈이 이씨 부부의 1년 생계를 책임질 순 없다. 아요 인권운동연대 활동가는 “구청에 이 문제를 문의했더니 ‘다른 집도 다 그렇다. 매달 용돈 받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더라”고 어이없어했다.
조사팀은 이씨의 아들에게 부양 여부 및 부양의무 이행의사 확인서 제출을 요구했지만 실태조사 이후 확인서와 관계없이 이씨의 수급 신청 부적격을 결정했다.
이씨의 아들은 부양의무 이행의사 확인서를 통해 “개인사업 실패로 사채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쓴 이자를 갚는데 월급을 사용하여 부양할 여력이 없다”고 부양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서구청 통합조사팀 관계자는 “아들과 전화통화도 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가족관계 단절이라 볼 수 없어서 부적격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아요 활동가는 “이 경우 수급자 부/적격을 결정하기 위해서 지방생활보장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구청은 이 과정을 건너뛰고 자체적으로 부적격 결정을 내렸다”고 구청 심의 절차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 ▲이씨의 아들이 보내온 부양의무 이행의사 확인서. ⓒ
뉴스민 |
“가난한 부모가 무슨 염치로…”
이씨와 비슷한 사례
부지기수
취재 중 이씨에게 어차피 수급자가 되면 구청이 아들에게 보장비용징수를 할 테니, 아들에게 직접 용돈을 부탁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는 “지금껏 아들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돈이 없어 아들이 아직 결혼도 못하고 지내는데, 무슨 염치로 용돈을 달라고 하냐”며 “수급자가 되기 위해서 아들한테 이런 짓까지 하는 건데, 수급자가 안되면 이럴 필요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요 활동가는 “수도권의 경우에는 보장비용징수를 통해서 수급자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장기간 노숙 등으로 가족관계단절이 확실히 증명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하지만 대구의 경우에는 이씨 같은 분이 많다. 본인도 가난하고 아들도 도시빈민노동자일 경우에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에게는 손을 벌리지 못하고 구청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요 활동가는 “법의 취지는 수급 자격이 없는 사람을 거르자는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이씨처럼 실제로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사각지대로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법의 허점을 꼬집었다.
2010년 복지부가 밝힌 바로는 이 씨처럼 소득은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지만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10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복지부도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여러 차례 제도 개선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사각지대 해소에는 실패했다. 아요 활동가는 “실제로 부양의무자 기준이 있는 한 사각지대 해소는 어려울 것”이라며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주장했다. (기사제휴=뉴스민)
이상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