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2013.07.24 12:57

해방적인 말하기, 글쓰기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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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지겹게 되풀이하는 데 질렸습니다. 탯줄에 목이 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태어나 특수학교 기숙사에서 십칠 년을 보냈고… 장애가 어떤 성찰을 하게 해준 초석이었다면, 이제부터 나는 장애를 부인하지 않고 극복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장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지겨운 측면이 있다. 물론 내가 장애에 대하여 쓴 글은 쥴리앙에 비하여 훨씬 적을 것이고 내가 쓴 글의 독자 수는 쥴리앙의 백분의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쓴 모든 글의 독자이므로 지겨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늘 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도 같다. “검정고시를 보고 특수학교를 졸업한 후 일반고교에 가서 대학에 왔고… 그래서 중증장애 친구들과 비장애인 친구들이 존재하고 그 경계에서 진동하듯이 살고… 어쩌고저쩌고… ”

나에 대하여 서술해야 하는 일은 때로 흥미롭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루한 일이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같은, 이른바 ‘소수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를 언제나 요구받는다. 누군가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내가 법률가로서 장애인의 선거권문제를 공직선거법,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해석하고 법원의 판결례를 분석해서 서술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나는 19대 총선에서 투표를 하러 갔는데 투표관리위원들은 계단을 들어 올려주겠다고만 말하고 나더러 거소투표를 신청하지 뭐 하러 굳이 왔냐고 나를 비난했고…” 이런 경험을 했다고 진술하기를 기대한다. 당연히 이런 말이 훨씬 더 힘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장애인들의 자기서사(narrative)는 최근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세상에 충격을 가하는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발언할 수 있는 자리,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인 요구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도 장애라는 렌즈를 거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나는 거의 모든 문제를 ‘장애’라는 경험을 투사하여 바라본다.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강력한 의혹에 대하여 내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하철을 탄다면, 나는 금세 만원 지하철 바로 앞에 놓인 키 큰 남자의 엉덩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엉덩이에 코를 박은 상태에서 국정원이 뭘 어쨌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단은 내가 왜 엉덩이에 가까운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렇게 된 데에는 저 엉덩이 주인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주는 무력감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국가 재정은 왜 전동차 휠체어 전용석을 하나쯤 늘려 나를 엉덩이로부터 떨어뜨려 놓지 않고 ‘일베’에 댓글을 다는데 쓰여야 하는지 정도의 부당함을 느끼는 것으로 고민은 정리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세상에 대한 명징한 지식,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더 높은 시점의 나'를 발견했다. 우리도 가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나 자신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눈을 감고, 지금 나를 휘어잡고 있는 온갖 고민과 번민에 대하여 마치 제3자가 된 것처럼 관찰해보라. 누구든 그것을 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근대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관찰자로서의 나’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의 토대를 닦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는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는 (그것이 실제로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시각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 번 그러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리 장애가 있는 나, 또는 장애에 대하여 사고하는 나 자신을 ‘관찰하는’ 더 높은 의식의 ‘나’를 발견하려 애써도, 언제나 그렇게 발견한 듯 보였던 높은 의식의 나 자신 역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만이 바라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지하철에서 키 큰 남자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 관점은 분명히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그것과 무관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 누구도 소위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익힐 수는 있다. 그러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규정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잠시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매우 어렵다.

이처럼 강력한 ‘정체성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 정체성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 강박에서 풀려나 다른 문제들을 그 자체로 깊이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도 미토콘드리아나 양봉업과 같이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쓰기를 하는 게 가능할까?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실은 모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나의 모든 분야에 대한 관심은 지독할 정도로 장애라는 렌즈를 통과하고 내가 관심을 두는 어떠한 ‘문제’들은 모두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나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떠한 문제를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진정성 있고 진실에 가까운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수많은 사회적 사실과 문제들이 자아의 영역으로 귀착하면, 관심을 갖는 모든 문제를 삶으로 떠안아야 하는 피로와 맞서야 한다.

해방적 글쓰기는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정성을 가지고 할 때 가능할지도 모른다. 장애에 대하여 스스로 더 많이 말해야 하고, 더 많이 써야 한다는 당면 과제와 더불어, 어떻게 말하고 쓰는 것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일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그러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데, 그래서 여기에 또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12770360244512.jpg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김원영. 서른 살이 넘었다. 장애, 연극, 법에 관심을 두고 산다. 골형성부전증으로 15년간 집에서만 살았으나 한국사회에서 태어난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 가방끈이 길다. 친절하지 않은 편이나 친밀한 친구들은 몇 있다.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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