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2013.08.05 12:55

밤에 피어나는, 어느 장애인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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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20주년을 맞아 열린 명사특강 다섯 번째 시간으로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의 ‘존재염색 ― 노들에 물들다’ 강연이 지난 7월 31일 저녁 7시 노들야학에서 열렸다.

“2008년 어느 가을밤이었습니다. 당시 공정택 서울교육감이 장애인 교육예산을 20% 삭감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오던 밤이었습니다. 그날은 또한 노들야학에서 제 첫 철학 특강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오늘 특강은 노들이 아니라 서울교육청 앞에서 열린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교육청 문 앞을 지키는 경찰들과 노들 학생들 사이에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 수업 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학생들은 수업 대형을 만들었고, 저는 가로등 아래서 스피노자에 대한 강연 원고를 읽었습니다.

교육청 공무원도, 문 앞 경찰도, 길 건너 상점 주인도, 모두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가로등 아래서 경찰과 대치한 상황에서 노들의 학생들과 스피노자에 대한 원고를 읽으며 나는 노들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급진적인 장소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맑스의 『공산당선언』보다 급진적으로 읽혔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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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의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노들’이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아래 노들야학)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성인 장애인 절반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2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저상버스도, 활동보조인도 없던 시절, 장애인에게 ‘교육’이란 어떠한 의미였을까.

노들야학 개교 20주년을 맞아 열린 명사특강 다섯 번째 시간으로 수유너머R 고병권 연구원의 ‘존재염색 ― 노들에 물들다’ 강연이 지난달 31일 저녁 7시 노들야학에서 열렸다.

1993년, 노들야학은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의 교육사업의 하나로 장애인의 ‘조직화’와 ‘의식화’를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노들야학은 학습 계획부터 재정 운영까지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해나가게 된다.

그렇게 스무 해, 노들야학은 2000년대 장애인이동권 투쟁, 활동보조 투쟁 등 진보적 장애인운동이라 불리는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은 예전 한 인터뷰에서 “한글을 못 쓰는 장애인들에게 ‘철수야 영희야’ 가르치는 것하고 ‘활동 보조’ ‘이동권 권리’ 같은 단어를 써서 가르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규항의 좌판](4)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박경석)

노들야학의 역사가 말해주듯 노들야학은 교육과 운동이라는 두 영역이 고스란히 포개지는 교집합의 영역이었다. 이를 고 연구원은 “‘교육’과 ‘운동’은 노들야학을 떠받치는 두 개의 축이었다”라며 “‘교육운동’도 아니고 ‘운동교육’도 아닌, ‘교육’과 ‘운동’이 상호전환 가능한, 교육과 운동을 바꾸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그런 것, 배움과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어떤 배움과 운동, ‘교육=운동’의 등식으로 명명했던 그것”이 노들야학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배움 이전에 일어나는 의식에서의 '각성', 이것이 ‘배움 이전의 배움’이고 ‘해방 이전의 해방’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비단 교실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10월 모꼬지 때 TV에서 보았던, 그렇게도 부러웠던,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 부르고 얘기하는 것을 해보았을 때 너무 좋았어요. 우리도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하고 얘기도 나누고요. 그때 하늘을 보신 분이 많으리라 생각해요. 모든 별들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서 비추어 주는 것 같았어요. 그땐 정말 눈물이 나와서 울 뻔했어요. 무언지 모를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군요.”

1996년 불수레반(중등과정) 학생이었던 안명옥 씨의 글이다. 고 연구원은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모닥불을 실제로 피워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경험이 이 장애인 학생에게 “정말로 중요한 변혁을 일으켰”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불가능이 가능으로, 어떤 무능력이 능력으로 바뀌는 체험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으며 “변혁 운동에 뛰어들기 이전에 자기 안에서 경험하는 어떤 변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 나가서 어떻게 살래?”라고 물었을 때, “나가서 살고 싶어. 한 번 겪어 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 야학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선생님이 있어 등 뒤가 든든하게 와 닿고, 그 힘 빌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힘. 이것은 학교에 다니며 지식을 쌓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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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

“장애해방을 지향하는 교육과 운동이 정서나 감성에 착목해야 이유는 그것이 ‘장애’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애가 어떤 본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장애란 학교, 직장, 사랑, 결혼, 운동 등등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하는 어떤 불가능과 관계됩니다. 어떤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순간, ‘할 수 없음(disability)’, 즉 ‘장애(disability)’를 경험합니다. 장애가 있기에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장애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 활동의 불가능성이 커질수록 중증장애인으로 간주하겠지요.

장애란 이런 불가능성들의 체험이며, 그 순간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무능(disability)’에 대한 인정, 그리고 결국에는 어떤 ‘포기’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 장애라는 범주에 완전히 갇혀 버리는 것은 ‘무능’을 자기에게 돌리고 그런 자기를 ‘포기’할 때입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그 무능을 인정하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해왔습니다. 가족이 무능을 고백하고, 사회가 무능을 승인하고, 마지막으로 장애인 자신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도록 만듭니다. 의지가 꺾이면서 우리의 신체와 영혼은 버려진 어떤 것, 포기된 어떤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권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가령 시설 같은 곳에 맡겨집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어떠한 것을 갈구하는 ‘욕망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갖고자 시도해보는 것이다. 지식 이전에 욕망을 일깨워 이 사회가 ‘장애인’에게 규정한 삶의 틀이 아닌 그 바깥 세계를 맛보고 그 맛을 갈구하게끔 한다.

고 연구원은 “이런 맥락에서 말해보자면 나는 노들이라는 학교의 의의는 새로운 ‘지식’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게 한 것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라며 “노들에서의 ‘교육’과 ‘운동’은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실험이자 연구이며, 배움이자 각성이고, 요구이자 투쟁이며, 무엇보다 그것에 대한 욕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그렇기에 ‘노들’에서의 경험은 그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야학에 가고자 시설 밖을, 집 밖을 나올 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턱’과 휠체어 바퀴가 맞부딪혔을 때 그 둘은 비로소 서로 마주할 수 있었고 각자의 세계에 균열을 냈다. '우리 사회의 온갖 문턱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고 연구원은 ‘밤의 학교’로서의 노들야학을 주목한다. 분명히 장애인도 ‘낮의 학교’에 아무런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겠으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교육=운동’이라는 등식은 큰 위험에 빠지고,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배움은 있겠지만 ‘배움 이전의 배움’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지식은 쌓이겠지만 각성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현재의 삶에서 지위를 상승시킬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밤의 학교’로서의 노들야학의 존재 이유다. 밤은 단지 물리적 시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낮의 시간과 체계가 깨지고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이며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노들의 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장’을, ‘교육=운동’이라는 등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며, “권력이 부추기는 모든 ‘포기’”에 맞서겠다는 저항이며 끊임없이 ‘욕망’하겠다는 선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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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연구원의 특강에 이어 참가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노들야학 하금철 교사는 “오늘 한 이야기는 학습자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교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나”라며 “교사란 대체 무엇이며 교사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고 연구원은 “교사와 학생은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 배움에 참여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며 노들야학 누리집에 올라와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의 말을 빌려 설명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고 연구원은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노동만 했다면 그것은 일상에 있었을 뿐 현장에 개입한 것이 아니다”라며 “사건이 일어나면 각각의 배움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함께 배운다고 생각하며, 교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민은 ‘이 사건의 현장에서 어떻게 배울까’에 있다.”라고 답했다.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은 “1993년도에 야학이 생긴 후, 이동권, 활동보조 등 양적인 환경이 나아지면 안락한 삶을 살 것 같았는데 이 공간과 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삶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보다 무거운 삶의 무게가 있다”라며 “93년도에 후원주점을 열어서 100만 원 버는 게 지금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1000만 원 버는 것보다 더 마음 편했던 때가 있었다”라고 전했다.

박 교장은 “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 들어가 투쟁과 교육을 하고, 지역사회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던 것이 힘들지만 행복했다”라며 “또 그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노들에서의 교육과 운동에서의 문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장은 “노들은 20년의 삶 속에서 자기 존재 증명을 했다고 본다”라면서 “많은 변화를 만들었던 그 과정이 소중하다”라고 밝혔다.

노들야학 학생 김재연 씨(뇌병변장애)는 “공부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하면 내 삶을 배우게 된다”라고 말했다.

김 씨는 “수학, 과학, 국어는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부는 사회가 만든 것”이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점점 커가면서 친구 사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게 공부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이날 강의는 세 시간가량 진행되었으며, 현직 노들야학 교사와 학생을 비롯해 지난 20년 동안 노들야학을 거쳐 갔던 교사와 학생들도 참여해 스무 해의 노들야학 역사를 함께 톺아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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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 노들야학 한편에 전시된 노들 사진을 바라보는 고병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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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기념으로 노들야학 학생이 그린 초상화를 받은 고병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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