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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제를 비롯해, 박근혜 씨가 대통령선거를 하며 내걸었던 복지정책이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이젠 거의 명시적으로 포기되는 추세 같다. 나야 뭐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 일이긴 하다. 안타까운 건 자신들이 내 걸었던 것조차 폐기하는 그들에게, 자기들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은 결코 듣지 않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하는 분들의 난망하고 곤혹스런 처지다.

 

얼마 전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 전부터 보건복지부 앞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던 장애인 활동가였다. 오늘이 농성을 시작한지 300일째라고, 아무도 듣지 않는 함성을 외치며 300일이 지났다고 하는 그 분의 목소리에서, 약간 술에 젖어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 말을 반복하는 이의 고독감과 그 반복 속에서 지쳐가는 적지 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결연하게 싸울 때는 철로에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는 것도 주저하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던 분이었기에, 짠했다. 장애의 몸으로, 언제까지 들어줄 것 같지 않은 저 농성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전에 부양의무제가 저소득층이나 장애인에게 얼마나 잔혹한 제도인가 글을 쓴 적이 있다.(가족의 존재는 어떻게 운명적인 저주가 되는가?) 기초수급금을 받기 위해선 가족들과 연락도 해선 안되고, 서로 왕래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서류에 도장을 받으러 가게 하는, 가족의 존재 자체를 저주스러운 짐으로 만들어버리는 제도, 그것이 지금의 부양의무제다. 가족에게 부양의 의무를 지우는 제도, 도울 가족이 없을 때에만 사회가 도와주겠다는 제도. 수급자가 정말 저소득자인지, 가족들과 연락이 없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일인당 수천~수만 명의 대상자들을 ‘관리’하고 방문해야 하는 복지사들의 연이은 자살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도록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처리한 서류 때문에 항의하거나 자살하는 노인들을 보게 될 때 그들이 느낄 무력감과 절망감, 그건 진지하고 책임감이 있는 분일수록 강한 것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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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 수급자 다 죽이는 보건복지부 규탄한다!'라는 내용의 피켓을 든 사람.


그런데 부양의무제를 저렇게 고집스레 고수하려 한다면, 차라리 부양의무제를 오히려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여,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것도 해결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자리가 없거나 일하고 받는 소득으로는 생존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을,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먹여 살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활능력이 없는 이에 대한 부양은 공동체의 의무였다. 종종 드는 예지만, 심봉사와 어린 심청이 먹고살 능력이 없었음에도,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속한 마을 공동체가 그들을 부양했기 때문이었다. 심청의 모친인 곽씨부인이 죽었을 때, 장례식마저 성대하게(!) 치러준 것도 그들이었다. “열 사람이 저마다 한술씩만 덜면 밥 한 그릇이 되듯이, 우리 동네 백여집이 한 냥씩만 내서 곽씨 부인 장사를 치러주면 어떻겠소?”

 

그래, 부양은 의무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우리 모두의 의무다.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생활의 곤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에 대해 부양의 의무를 지는데 동의한다. 내 가족의 부양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처럼, 그런 분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거나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나만은 아닐 거다. 자신이 가진 돈이 얼마 안되는 이들도, 이런 취지의 부양의 의무를 나누자는 제안을 거절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2009년에 일본에 갔을 때, 그해 초에 있었던 ‘파견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대량으로 생겨난 파견노동자 해고로 노숙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이들 노숙자에게 가장 난감한 게 연말연시 휴가기간이라고 한다. 우리로 치면 일주일 정도의 긴 설연휴 기간인데, 이때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거리급식도 중단되고, 날은 더없이 추워 노숙하다 동사하기 십상인 시기라고 한다.

 

하여, 반빈곤네트워크 등 여러 단체들이 연합하여, 이들을 위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숙소와 식사, 그리고 노동상담, 생활 상담 등을 하는 ‘파견마을’을 만들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거기 ‘촌민’으로 와서 등록한 이가 505명이었고, 풀타임 자원활동가로 등록한 사람만 1692명, 순식간에 모금된 돈은 총 4,400만엔, 쌀이나 식재료, 과일, 텐트나 침구 등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부양의 의무를 나누겠다고 하는 이들이, 부양의 의무를 나눈 거대한 공동체가 순식간에 출현한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아주 흔하다. 카트리나로 박살난 뉴올리언즈, 지진과 원자력사고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태풍이나 수해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이면 언제나 어김없이 나타나는 게 이런 ‘부양의 공동체’들 아닌가! 이렇게 부양의 의무를 지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보면, 공동체의 범위는 단순한 지역의 범위는 물론 국가의 범위도 뛰어넘는다.

 

자본주의가 수많은 공동체들을 깨버렸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공동체들이, 새로운 종류, 새로운 범위의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계속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만이 부양의 의무를 지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일 함께 먹고 함께 자는 이 말고는 볼 줄 모르는 아주 좁은 시야에서 나오는 단견이고 오해다.

 

더구나 국가는 자신이 국민 전체의 공동체임을 거듭 표방하고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 공동체의 성원들을 위해 쓰겠다며 모든 국민에게서 세금을 걷어가고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사회보험 또한 부양의 의무를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가? 건강보험은 진료와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럴 돈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사회의 다른 성원들이 부양의 의무를 공동으로 지는 제도 아닌가? 사회연금보험은 은퇴한 앞 세대의 노후생활을 위해 뒷 세대가 부양의 의무를 공동으로 지는 제도 아닌가? 기초생활수급권자들에게 기초수급금을 주겠다는 제도는,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 대해 사회 전체가 부양의 의무를 지겠다는 제도 아닌가?

 

이런 점에서 부양의 의무가 오직 가족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지금의 부양의무제는 아주 편협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모르는 부양의무제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의해서 부정되고 있는 부양의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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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수급자 윤국진 씨가 광진구청으로부터 받은 문건. 부양의무자인 아버지에게 소득 변동이 있었다는 이유로 수급액 약 28만원이 삭감될 예정이라고 적힌 통고문.

 

국가는 자신이 하나의 공동체라고 믿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금을 걷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부양의 의무는 ‘국가공동체’에 속한 전국민의 의무고, 부양의 대상 또한 그에 속한 전국민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부양의 의무는 그 공동체의 성원 전체가, 전국민 가운데 생활능력이 없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함께 지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

 

칸트 같으면 전국민을 하나로 묶어 ‘자기’에 대한 ‘자기’의 부양의무라고 말했을 이런 생각은 알다시피 쉽게 입에 발린 소리가 된다. 듣기 좋지만, 실제론 아무 내용도 없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허한 외침. 매일매일의 힘든 삶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부양의 조치들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저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한 핏줄, 한 가족이야’라고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빈곤으로 삶이 고달픈 이들에겐 아주 짜증나고 심히 고통스런 일일 것이다.

 

전국민에 대한 전국민의 부양의무제, 나는 기본소득제가 그런 것일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이가 자신의 소득수준에 따라 내는 세금으로, 혹은 국가가 걷는 이런저런 세금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을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 이것을 모두에게 지급하기에, 수급자들의 빈곤이나 가족의 부양능력을 확인하는 일과 비용이 필요가 없기에 쉽고 ‘공정’하며 비용이 적게드는 제도라는 건, 하시모토 같은 일본의 우파 정치인도 인정한 바 있다.

 

부양받는 자에게 모욕감과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일하지 않고 부양받으려 할 것이라는 도덕의 경제학은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도덕가들이 만들어낸 턱없는 악의적 신화다. 최소소득이 있다고 일자리가 있는데 일 하지 않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모욕적인 경제적 피부양과 속편한 치명적 빈곤 사이에서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를 고민하게 하는 게 아니라, 경제적 복지만큼이나 ‘정신적 복지’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본소득제의 중요한 장점은, 모든 이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에, 부양받는 어떤 이도 ‘생활능력이 없어 부양받는다’는 정신적 부담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즉 빈곤 이상으로 힘든 빈곤의 자의식 없이 기본생활을 유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경제적 복지 못지않게 ‘정신적 복지’ 또한 제공하리라는 것 아닐까? 삶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모름지기 복지라면 이런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이 글은 경향 <아티클>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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