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이 1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비마이너는 지난 농성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글과 사진으로 되돌아보고 공동행동이 요구하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가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현장 간담회를 통해 이번 농성의 의미와 성과, 전망 등을 살펴봅니다.
① 광화문 농성 1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② 광화문 농성장 현장 좌담회
③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어디까지 왔나?
④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 농성 1년
![]() ▲지난 2010년 점거농성이 진행 중인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 앞에서 중증장애인들이 목에 칼을 쓰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촉구하는 모습. |
1년이 흘렀고 네 개의 영정이 들어섰다. 21일이면 광화문역 해치마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이 농성 1년을 맞이한다. 그곳은 이제 낯섦보다 익숙함으로 풍경처럼 존재한다.
문제는 그 이전부터 오랜 시간 발생했다. 장애등급 재심사로 등급이 하락했다. 등급 재심사로 어제는 장애 1급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장애 2급이 되었다. 등급 하락은 당시의 활동보조서비스 이용 탈락으로 이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활동보조제도는 1급만 이용할 수 있었다.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수급자들의 수급비가 삭감되거나 아예 수급권자에서 탈락했다. 거주시설에서 수십 년 살다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준비하려던 중증장애인들은 수급비를 받을 수 없다는 통고를 받는다.
현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불가능한 이들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는 것이었으나, 수십 년 동안 연락이 끊기고 심지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의 소득이 잡혀 수급자가 될 수가 없다고 하니 탈시설에 대한 욕망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힌다.
지난해 8월 6일, 경남 거제시청에서 한 할머니가 음독자살했다. 사위 소득이 잡혀 수급비가 깎여서였다. 고인은 유서에서 “법도 사람이 만든 것일진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보다 앞서 지난 2010년 10월에는 발달장애아들을 둔 일용직 아버지가 부양의무제로 아들이 수급권을 받을 수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수급비 삭감, 탈락으로 사람들이 자꾸 죽었다. 복지부는 “어쩔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인간이 만든 법이 인간을 죽이고 있었다.
사건은 파편처럼 이곳저곳에서 튀었다. 계기는 충분했다.
![]() ▲광화문역사 내에서 경찰이 장애인들의 이동을 막자, 한 중증장애여성이 전동휠체어에서 내려 방패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 |
2012년 8월 21일 오후 2시경, 광화문역에 휠체어를 탄 수십 명의 중증장애인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경찰이 방패를 들고 이들의 이동을 막았다. 경찰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차단했다. 엘리베이터, 휠체어 리프트, 에스컬레이터. 그러나 계단은 열어두었다. 걸을 수 있는 이들만이 계단을 통해 갈 수 있었다. 장애인들은 휠체어에서 내려 계단을 기었다.
이날 기어가는 행위는 더 이상 ‘구걸’이 되지 않았다. 이 사회의 불투명한 일상의 비닐을 찢고 그들은 얼굴을 내밀었다. ‘몸의 다름’으로 비가시적 존재가 되었던 이들이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11시간 넘게 대치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그날 자정이 지나서야 광화문역사 시멘트 바닥에 스티로폼 은박 깔개를 깔고 몸 뉘일 수 있었다. 무기한 농성의 시작이었다. 지붕 없이 엿새를 났다. 8월 27일, 당시 민주통합당 정세균 대통령 예비후보가 농성장을 방문하던 날, 천막을 쳤다.
농성단은 지나가는 시민에게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해를 알리고 12월에 있는 대선을 겨냥해 정치권에 압박을 가했다.
10월 26일 새벽,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3시간 뒤인 새벽 2시 자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고 김주영 활동가가 사망한다. 문까지 몇 발자국을 나오지 못해 질식사한 것이다. 10월 29일엔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일어난 화재로 당시 집에 있던 고 박지우·지훈 장애인 남매가 사망한다.
잇따른 중증장애인들의 죽음으로 활동보조 24시간 요구에 대한 거센 목소리도 농성장에 깊이 파고든다. 한해가 지나기도 전에 세 사람의 영정이 농성장에 자리하고 분향소가 마련됐다. 그해 겨울엔 중증장애인들의 화재사고 보도가 유독 잦았다.
12월 19일, 18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대통령 행정명령 1호로 장애등급제 폐지를 추진하기로 하는 등 장애등급제 폐지가 주요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 공약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주요 대선 후보들은 부양의무제에 대해서는 폐지가 아닌 개선이라는 소극적 견해를 밝혔다.
2013년 새해 봄, 광화문 농성장을 거점으로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 시작된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중심으로 발달장애인법 제정, 수화언어기본법 제정, 장애인활동보조 24시간 보장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커다란 흐름 속에는 일상으로 자리한 농성장을 지키기 위한 지류들이 있었다. 지역 활동가들이 일주일씩 올라와 농성장을 지켰고, 장애인권리보장법, 탈핵 관련 강의 등 크고 작은 강의들이 농성장에서 꾸준히 진행됐다.
농성장에 연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투쟁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철거민, 노숙인, 쪽방촌 사람들, 성소수자 등의 이야기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광화문역에 투쟁의 거점을 마련하게 되면서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 시청 앞 재능 농성장 등과 연대의 인프라를 구축하기도 했다.
![]() ▲ 광화문 농성장에 설치된 고 김주영, 박지우·지훈 남매, 박진영 씨의 분향소. 지난 13일, 민주노총 신승철 위원장, 유기수 사무총장이 찾아 넋을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
그러던 중 지난 7월 3일, 고 박진영 씨가 사망했다. 박 씨는 장애 의무 재판정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아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서 박탈될 위기에 놓이자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 주민센터를 찾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농성장에 또 하나의 영정이 들어섰다.
그리고 복지부는 지난해 거제시청 사망 사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도 현장조사 없이 사회복지통합관리망에 나온 숫자만으로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 상반기 확인조사를 진행했다. 이 때문에 수급비 삭감 및 탈락 통고를 받은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농성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농성장에서는 이 농성을 지지하던 자신의 장애인 동생이 죽었다며 남은 부조금 200만 원을 후원하고 간 이도 있고, “이제 시위 그만 하세요. 거리가 너무 난잡합니다. 보기 너무 흉합니다.”라고 방명록에 써놓고 간 이도 있다. 농성장은 그렇게 여러 목소리가 만나고 여러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그러나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그 무엇하나 해결된 것이 없기에 농성은 계속된다. 자신의 몸은 어제, 오늘 똑같은데 어제는 1급이었다가 오늘은 2급이 되었다. 장애 등급이 하락했다는 것은 장애가 경하다는 것인데, 장애인이 천대받는 사회에서 1급에서 2급이 됐다면 좋아해야 하는가? 웃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등급 하락은 즉각 서비스 삭감을 의미하기에 자기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장애가 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지를 입증해내야 한다.
이 비인간적 제도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간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났던가. 농성 1년, 광화문 농성장은 사람이 죽을 때면 “어쩔 수 없다. 법이 그렇다.”라고 응답하던 정부의 태도에 맞서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는 전방이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