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04 19:10 입력
조은별 기자 sstar0121@beminor.com
비마이너가 가난한 사람들의 ‘차별받은 식탁’을 찾아갑니다. 수급자 가구의 식탁을 찾아 최저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 또한 중증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맛집을 찾아 함께 밥을 먹으며 모두에게 공평한 식탁은 무엇인지 묻고자 합니다. |
“2년 전에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복지지도라고 편의시설이 돼 있는 곳을 지도로 만드는 일을 했거든요. 근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50군데가 안 되더라고요. 입구 사이즈가 안 나오고, 들어갈 수 있어도 방이면 안 되니까. 이건 전국 팔도 어디든 똑같긴 해요.”
어디를 가나 적용되는 문제. 편의시설. 상황은 지방일수록 심각하다. 저상버스를 기다리고 타는 시간에 전동휠체어로 그냥 ‘굴러’가는 게 더 빠른 지역이 수두룩하고 식당을 찾는 게 힘들어 외식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이번에는 강원도 원주를 찾았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원주역에서 다시 차로 10분을 더 들어가면 시내가 나온다. 대형 영화관과 상가가 즐비한 곳에서 권오승 씨와 변윤태 씨, 이정자 씨를 만나 근처에 있는 '공지천 닭갈비' 집으로 향했다.
![]() ▲강원도 원주에서 찾은 공지천 닭갈비. 역시 정문이 아닌 쪽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해 편의시설이 당연히 잘 돼 있겠거니 했는데, 도착한 그곳은 반 층 높이의 계단들이 있었다. ‘여기를 어떻게 자주 오지?’라는 물음도 잠시 조먹간 1편에서 사용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옆으로 들어가 쪽문을 찾았다. ‘다행히도’ 화장실을 가도록 만들어놓은 문으로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오승 씨, 윤태 씨, 정자 씨 그리고 활동보조인 세 명까지 빙 둘러앉아 닭갈비를 주문했다. 야들야들한 살을 발라내고 뻘건 양념장으로 버무린 뒤 떡과 야채와 함께 볶은 닭갈비는 먹음직스러웠다. 볶음 요리의 필수 조건인 면 사리도 추가해 맛을 더했다.
잘 익은 닭갈비를 먹으며 오승 씨는 시설에서의 생각이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
“예전에 시설에 있을 때는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으면 아침밥을 안 줬어요. 점심은 떡이나 빵으로 주는데 그게 근처 교회에서 후원받는 거라서 아무래도 먹다 남은 거나, 오래된 걸 주나 봐요. 곰팡이가 다 피었는데도 그냥 주더라고요. 안 먹으면 때리고. 지금도 빵은 못 먹겠어요.”
종교 관련 시설에서 살았던 오승 씨는 강제로 금식기도에도 동참했다. “금식 마지막 날에는 소금물 한 바가지를 한 번에 다 마셔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마셔요. 중간에 마시다 토하면 다시 한 바가지 주고.”
정자 씨는 원래 걸어 다녔다. 등이 굽어 장애 3급이었지만 직접 운전도 하며 나름 ‘잘’ 살았다. 그런데 한 번의 수술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전과 후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휠체어에 앉아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제가 2008년에 척추협착증 수술을 받았거든요. 다리가 저려서 내 발로 수술하러 걸어 들어갔는데 그 뒤로 휠체어를 탄 거죠. 수술은 잘 됐다고 하는데 하반신 마비가 와서요. 걷다가 휠체어를 타니까 죽을 맛이더라고요. 예전에는 운전도 혼자 해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먹고 싶은 음식은 언제든 찾아가서 먹는 성격이었어요. 계단 있는 식당이 예쁜 줄만 알았지. 휠체어 타니까 그때 알겠더라고요.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걸.”
![]() ▲이정자 씨. |
근육장애가 서른 즈음 발생한 윤태 씨도 휠체어에 타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르다며 정자 씨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장애가 생기기 전에는 친구들이랑 맛있다는 집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근육병이 생기고 나서 휠체어를 타게 되는 순간 어디를 간다는 게 참 부담스럽더라고요. 음식점에 편의시설이 전혀 안 돼 있으니까 처음 몇 번은 친구들이 업어주고 휠체어는 따로 옮겨주고 했지만, 그게 친구도 고생이고 나도 부끄럽고 하니까…. 나중에는 병원 간다고 하고 약속을 안 잡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사이도 소원해지더라고요.”
문턱이 없었다면 친구 사이가 소원해졌을까. 함께 놀러 다녀야 하는 곳이 경사로로 된 곳이었다면 함께 가는 게 부담스러웠을까.
닭갈비를 다 먹고 볶음밥을 주문할 때 쯤 지난 8월 24일 공표된 2014년 최저생계비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정자 씨는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걸 올려줬다고 생색내고, 차라리 올려주지 말지. 최소한 10만 원은 오를 줄 알았어요. 겨울에 추워도 참으면서 보일러 안 켜고 살아요. 춥지 않게 살려면 10만 원은 들 텐데 2만 원도 안 되는 돈을 올려주면서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여가지고….”
윤태 씨도 최저생계비 인상을 비판했다. “집세만 25만 원이 들어요. 거기다가 통신비 들지, 여기저기 활동하려면 밥도 먹어야 하는데 1만 9천 원정도 오른 걸로는 올랐다고 느껴지지가 않네요.”
![]() ▲윤태 씨와 오승 씨. |
“집을 구해야 하는데, 예전에 살던 집은 휠체어로는 화장실 진입이 안 돼서 지금은 부모님 집에 있어요. 그래도 집세는 부모님께 드리니 돈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에요. 외식은 아예 안 하려고 하는데도 집에서 밥 먹으면 또 부모님께 식비를 내야 하니까. 돈을 모은 것도 없어요. 장애인이 되고 나서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을 다 써버렸어요. 수급자가 되기 전이었으니까.”
추워도 보일러를 틀지 않는 사람들. 주거비에만 수급비 전부를 쏟아도 부족해 집에서 ‘아무거나’ 먹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높으신 분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2014년 최저생계비는 2013년에 비해 1인 가구 기준 1만 9610원 인상됐다.
밥까지 볶아먹었으니 닭갈비 코스는 끝이 났다. 마무리로 사이다를 마신 뒤 다시 모두 쪽문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며 정자 씨는 덤덤히 얘기했다.
“어딜 가든 똑같아요. 외식을 못 하는 건 계단 때문이지만, 계단이 없어진다고 외식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계단 없는 곳은 3~4만 원 대 고급 식당이잖아요. 그냥 활동하는 자립생활센터에서 같이 밥 먹는 거. 그 정도를 외식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요.”
그냥 나와서 밥 먹는 것. 이것을 외식으로 위안 삼아 살아가고 있다. 난방비가 아까워 추위를 참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계단 때문에 쪽문으로 돌아 식당에 가는 그들의 식탁에 오늘은 어떤 밥이 올라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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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별 기자 sstar0121@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