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금의 역사, 수용의 시간과 형제복지원’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22일 오전 11시 한국방송통신대에서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등의 주최로 열렸다. |
형제복지원을 독일 나치 시절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대입하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이름만 다를 뿐 내용에 있어 그대로 구현되었다는 것이 전규찬 교수의 설명이다.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하고 1987년 시설 평균 수용인원 474명보다 월등히 많은 35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했던 형제복지원. 그러나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뒤, 언론에서 그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화 과정을 지나오면서 언론도, 그 시설 속에 살았던 어떤 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이러한 것들을 가능케 한 시대적 환경은 어떠했으며 언론은 왜 이 사건을 봉인했나. 한국사회의 수용·감금 정책의 정치사회학적인 면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감금의 역사, 수용의 시간과 형제복지원’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지난 22일 이른 11시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아래 형제복지원대책위) 등의 주최로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나뉘어 진행되었다. 오전에 진행된 한국 수용·감금 정책의 정치사회학에 대해 요약해본다.
# 부랑아→부랑인, 시설은 ‘변이’하여 살아남는다
“난 부랑인이 아니었는데…”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피해자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이다. 이것이 ‘부랑인이라면 잡아넣어도 된다’라는 긍정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설에 가둬도 괜찮다’라는 근거가 된 부랑인은 대체 누구였는가를 탐색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박숙경 교수는 1950~60년대에 횡행했던 부랑아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부랑인은 익숙한데 부랑아라는 개념은 생소하다. 이는 부랑인 이전에 풍미했던 개념으로 부랑아 시설은 이후 부랑인 시설로 변이한다.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박숙경 교수 |
한국전쟁 이후 사회복지시설 중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동 관련 시설이었다. 1956년 후생 및 복지시설 603개소 중 육아원은 396개소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부랑아 숫자는 더욱 증가한다. 1965년에 부랑아 단속 수는 절정에 달하며 약 2만 8000여 명의 아동이 부랑아로 단속되었다.
부랑아 증가가 전쟁 때문이라면 전쟁의 영향이 약해지던 60년대 중반부터 이 숫자는 감소해야 한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더욱 증가했다. 따라서 부랑아 증가는 단지 전쟁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시기는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이행기와 겹친다. 1950년, 농촌은 빈곤했고 토지개혁(1952~59년)은 자연농을 형성한다. 땅 잃은 농민들, 그중에서도 어린 아동들은 도시로 이동한다.
당시 이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두며 노동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도시에선 밀려오는 이들을 받아줄 공장은 부족했다. 즉, 자본주의 이행기에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못했던 이들, 체제화되지 않았던 어린 아동들이 부랑아였다.
하지만 1970년대, 아동 시설 영역은 급속히 줄어든다. 1970년대 후반에는 1960년대의 절반에 그쳤다. 이는 중등교육이 보편화하면서 자본주의 이행기 체제에 편입되지 않았던 부랑아들이 학교와 산업현장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1979년엔 중학교 진학률이, 1985년에는 고등학교 진학률이 각각 90%에 달한다. 또한 15~19세의 취업률도 높아진다.
그러다가 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상에 최초로 부랑인에 대한 정의와 처우가 공식화되고 부랑아라는 개념 대신 부랑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박 교수는 “부랑인 계열의 정책은 1960~70년대 군대적 강제 동원으로 자의적, 공개적으로 행해졌다면 1980년대 들어선 법률에 기반을 둔 강제보호와 강제 노동의 은폐로 변화했다”라고 지적하며 “피해자 증언에서 ‘부랑인이 아닌데’라는 의미는 ‘부랑아’로서 수용된 사람들이 ‘부랑인’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사하기 어려운 현상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의 수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수용은 합당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인식은 시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부적합한 사람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는 인식으로 변화하면서 시설이 갖는 근본적 체제와 정책의 책임을 드러내는 노력으로 이어지진 못했다”라며 “실제 형제복지원 사건은 강제노동에 동원되거나 강제수용을 당했던 사람들을 시설 밖으로 무책임하게 내보낸 채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바꿔 수용하는 형태로 ‘변태’하여 현재까지 형제복지지원재단 이름으로 살아남아 있다”라고 밝혔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가운데) |
# 사건은 어떻게 봉인되었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삼청교육대와 연결해 말한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발령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의 하나로 설치한 기관이다. 당시 삼청교육대에는 폭력배뿐만 아니라 학생, 청소년, 노동자, 언론인, 광주 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끌려갔다.
전 교수는 “삼청교육대에서 일어난 일이 형제복지원에서도 그대로 벌어졌다”라며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의 수평적 링크를 통해 대감금의 역사를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에는 특히 어린아이가 많았다. 1987년 기준으로 원생 중 1~9세가 107명, 10~18세는 808명으로 18세 이하 915명은 전체 인원의 약 1/3에 달한다. 또한 1987년 당시 시설 평균 수용인원이 474명이었던 점에 비춰볼 때 3500명이 넘는 형제복지원의 수용 인원은 당시로써도 비대했다.
그러나 삼청교육대도, 형제복지원도 당시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일시적 보도 이후 언론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이면에는 국내외 부정적 여론을 부추길 수 있는 ‘선동적 기사’에 대한 국가의 검열·통제가 작용했다.
전 교수는 “바로 이 침묵의 검열을 통해 부랑인 소탕전은 완벽한 여론 공백의 현실, 비가시성의 현실로 은닉되어 무지와 무관심의 현실로 남게 되는 것”이라면서 “‘우리’와 무관한 상황이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만 발생한 특수한 비현실적 예외상태가 된다”라고 전했다.
한겨레신문 안영춘 기자 또한 1987년 민주화 과정을 지나오면서도 영원히 사건이 봉인됐던 그 지점에 질문을 던진다.
![]() ▲한겨레신문 안영춘 기자 |
안 기자는 “1987년 세상에 알려지고 26년이 지난 후에야 피해생존자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그에게 발언권은 왜 주어지지 않았나”라며 “그동안 한국사회는 민주화 과정을 거쳤으나 그 과정에서 형제복지원은 한 번도 가시화되지 않았다. 1987년 대서특필된 이후 형제복지원은 왜 미디어에서 실종됐는가”라고 물음을 던졌다.
안 기자는 이를 중간계급적 욕망과 이른바 진보 진영의 미학적 욕망으로 설명한다. ‘선한’ 시민들이 ‘우호적 매체’라고 생각하는 언론들은 중간계급적 욕망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중간계급적 욕망이란 정치적으로는 정의 감정에 위반되지 않으며 자신의 안전과 위생, 안보 이슈에 일정하게 소극적으로 공모하는 것을 뜻한다. 즉, 그 안에서 언론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형제복지원 사건을 영원히 봉인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의 욕망과 별도로 다른 이슈들은 수없이 환기되고 운동화 됐는데 형제복지원은 왜 이조차도 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안 기자는 “이들은 몫이 없는 자로 일정하게 분리, 배제된 존재였다. ‘나는 부랑인이 아닌데 왜 들어갔나’ 하는 피해자들의 문제의식은 중간계급 시민이 공유하는 태도와도 닿아 있다”라며 “그러한 존재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은 더 큰 운동과 견주면 부차적이고 열등한 위치에 있다. 형제복지원은 진보 진영의 미학적 욕망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왜 형제복지원 사건이 가시화되었는가’에 대해 다시 물어볼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즉, 그렇다면 지금 이 시기에 나온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안 기자는 중간계급 시민이 형제복지원에 대해 그런 식의 공모를 유지하는 것이 또다시 가능할지 되묻는다. 당시 중간계급 시민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가려놓고 배제했을 때 시민들은 위생학적으로 안전함에 처하게 되면서 자본주의 이행기의 한국사회의 성장의 과실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시대는 저물었고 공모 또한 불가능하게 됐다.
따라서 안 기자는 “공모 불가능의 시대에 형제복지원 문제는 특수한 사건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총체적 운동의 맥락을 띨 수 있다”라며 “특별법 제정이라는 프로젝트성 단위 사건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총체성과 만나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라고 밝혔다.
![]()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 |
# 형제복지원은 ‘예외 없는 비상시국의 예외 상태’였다
지난 11월 1일 서울역 구 역사와 서부역을 연결하는 서울역 인도육교 ‘구름다리’가 폐쇄됐다. 한국철도공사는 철거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더는 쓸모가 없고 난간이 낡아 열차 안전 운행에 지장이 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주변 홈리스들로 지속적인 민원이 발생한다는 거다.
이에 대해 홈리스행동은 육교에 거주하는 홈리스들에게 어떠한 대책도 없이 그들의 거주 공간을 철거한 것에 대해 중구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육교 폐쇄에 대해 언론은 ‘육교가 폐쇄됐다’라는 사실 보도 외에 이 사건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갖는지 묻진 않았다.
전규찬 교수는 “수용소 문제가 보편적 문제이고 그의 노숙됨이 나의 가능성을 말하며, 그때는 가담했으나 지금은 다를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전 노숙인들의 거처가 사라졌다. 반면 수용소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라며 “이 사건에 우리는 어떤 반응과 관심을 보였나. 이는 적대가 아닌 무지로 여전히 가담이고 모의다”라고 비판했다.
전 교수는 “그들도 피해자지만 우리도 피해자다, 그들도 수용소에 있지만 우리도 수용소에 있다며 논의를 보편화, 추상화시킨다”라면서 “그들을 나는 어떻게 보는지 커밍아웃하고 이 부분부터 이야기하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꼬집어 말했다.
또한 형제복지원 사건을 단일 사건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통사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 교수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과 민간인 학살, 삼청교육대로 이어지는 상시적 내전 상태, ‘예외 없는 비상시국의 예외 상태’라는 통사에 위치시켜야 한다”라며 “녹화사업, 안기부의 훈육·감금 조치 등의 프로그램들과 수평적으로 엮어내야 한다. 형제복지원은 행정편의주의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 한국 현대사의 상시적 사태였다.”라고 정리했다.
이날 토론회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오후에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과 국가책임과 관련한 특별법 제정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