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가 [마이너의 서재] 연재를 시작합니다. [마이너의 서재]는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삶을 다룬 다양한 책을 주류적 시선과 다른 방식의 조명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고자합니다. [마이너의 서재] 첫 번째 책은 시각, 청각, 언어 중복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의 삶을 가장 충실히 전하고 있는 전기 <헬렌 켈러 - A Life>를 소개합니다. _편집자 주 |
그러나 이어진 청중 토론에서 그는 탈시설 활동가들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질타를 받아야 했다. “탈시설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방향과 정당성의 문제”라는 원론적인 지적에서부터, “당신은 시설 장애인을 얼마나 만나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라는 감정적인 공격까지 나왔다. 급기야 사회자가 나서서 “편가르기식 발언은 자제해 달라”라고 나설 지경이었다.
“헬렌 켈러에게 필요했던 것이 시설인가, 자립생활인가? 헬렌 켈러는 설리번의 도움으로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나? 그런데 왜 우리는 헬렌 켈러 같이 유명한 장애인에게는 자립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제주도 시설에 갇힌 익명의 장애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 짓는가?”
![]() ▲도로시 허먼 저, <헬렌 켈러 - A Life> |
장애 극복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헬렌 켈러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 희망을 조명한 전기 <헬렌 켈러 - A Life>(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미다스북스)를 집어든 이유도 그래서다.
헬렌 켈러를 향한 세상의 의심과 오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지닌 사람이 수많은 책을 내며 뛰어난 지성을 뽐내자 세상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심과 오해를 사기도 했다.
첫 번째 오해와 의심은 헬렌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을 때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아니라 설리번 양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들어갔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수군댔다. 이런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 대학 학장은 시험이 시작되면 설리번이 그 건물에서 나가도록 하고, 두 명의 감독관을 배치해 헬렌의 시험을 감독하도록 해야 했다.
이런 의혹은 헬렌이 과연 대학을 다니는 것과 같이 사회적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이는 그녀가 알고 느끼는 지식과 감각에 대한 의혹으로까지 나아갔다. 헬렌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책에 “우리는 백합을 한 줄기 사서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봉오리가 고개를 내밀며 곧 피어날 준비를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 대해 <더 네이션>의 평론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헬렌이 세상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표현한 점을 들며 이렇게 비아냥댔다.
![]() ▲헬렌 켈러의 책 <내가 사는 세상> |
사람들의 의심과 의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헬렌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녀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적 성취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역으로 그녀를 ‘장애인’이라는 고정된 위치에 붙잡아 놓으려 했다.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 사실이지만, 헬렌은 당대의 노동자 투쟁과 러시아혁명을 지지했던 사회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볼모로 삼아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잡지의 편집자들은 그 글을 번번이 거절했다. 헬렌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과 ‘시각장애인’에 관한 얘기만을 쓰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삶을 더 넓은 측면에서 바라보는 진지한 글을 쓰면 사람들은 금방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현실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냐고 말하는 거야.” 이런 생각은 헬렌의 평생 동반자였던 앤 설리번 선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던 설리번은 자본주의의 미덕을 놓고 사람들 앞에서 존 메이시(설리번의 남편)와 큰소리로 다퉜다. 그때, 헬렌이 깜짝 놀란 기자에게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자 볼셰비키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생계가 걱정스러워진 설리번은 헬렌의 손을 가볍게 찰싹 때리고 그 말을 어떻게든 부드럽게 들리게 하려고 애썼다.
앤 설리번, 헬렌의 구원자 혹은 독재자
우리는 헬렌 켈러를 떠올릴 때 하나의 짝처럼 앤 설리번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사람이 헬렌의 ‘기적 같은’ 삶은 설리번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칭송한다. 설리번의 삶은 그런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설리번에 대한 평가를 이처럼 가벼운 ‘칭송’으로 끝내버리기에는 헬렌과 설리번이 느꼈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설리번 또한 시각장애가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다섯 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된 이후 시력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1880년에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교장 마이클 애너그노스는 그녀를 헬렌의 가정교사로 연결해준다. 후일 설리번과의 만남을 돌이켜보면서 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는 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허깨비였다. 영혼의 새벽이 열리기 전에 나에게는 의지와 지성이 없었다. 나는 물체나 다름없었고 어떤 눈 먼 자연의 반응체계처럼 행동했다. 그때 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었다.” (92쪽)
헬렌은 설리번을 통해 비로소 세상과 만나고 소통하며 자신의 지성을 가감 없이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둘의 관계를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음의 일화는 우리가 아름답게만 기억하고 있는 둘의 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리번은 자기 학생에게 전권의 권력을 휘둘렀다. 설리번은 헬렌에게 고전 작품만을 읽도록 했다. 한번은 헬렌이 그즈음 잘 팔리던 <폼페이 최후의 날>을 읽자 펄펄 뛰면서 헬렌의 손바닥에 “선생님이 네 잘못을 목격했어!”라고 되풀이해서 썼다. 또 헬렌이 시를 짓고 있어야 할 시간에 꽃 내음을 맡고 있자 헬렌에게 ‘멍청한 송아지’같다며 그날 내내 아무 말도 들어주지 않았다. 헬렌이 찰흙공예를 무척 서투르게 하자 차갑고 축축한 찰흙으로 헬렌의 얼굴을 찰싹 때리기도 했다.” (159쪽)
설리번은 헬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설리번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욕망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설리번은 그가 헬렌의 삶에서 가졌던 독점적 위치 덕분에 헬렌에게로 향하는 세상의 많은 정보, 인간관계 등을 통제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설리번은 마이클 애너그노스 등 설리번과 헬렌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다소 경솔한 방식으로 칭찬해 올 때면, 항상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888년) ⓒ위키백과 |
하지만 헬렌은 끊임없이 사랑을 꿈꾸고 실제로 사랑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의 순간은 헬렌의 곁에 설리번이 없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존 메이시와의 결혼 생활이 불화로 치닫고 폐결핵 진단을 받은 설리번은 레이크 플래시드로 요양을 간다. 설리번이 없는 그 짧은 순간, 헬렌은 그녀의 수화와 점자 통역을 맡은 피터 페이건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페이건과의 사랑은 헬렌에게 ‘내 무력함과 고독을 환한 빛으로 비추어 주는’ 기쁨을 전해주었다. 헬렌은 이 기쁨을 어머니, 그리고 설리번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둘의 연애를 먼저 알게 된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며 페이건을 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고, 이 결정은 설리번의 생각과 같았다. 결국 어머니와 설리번은 자기들의 ‘특권’으로 헬렌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헬렌을 수도원 같은 생활에 가두어 보호했다. 결국 헬렌도 자신이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자책을 하며, 이 짧은 연애는 자신의 천성과 반대되는 일이었다고 정리해 버린다.
그러나 헬렌의 천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헬렌이 <삶의 한복판>이라는 책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고백은 그녀의 ‘천성’이 그리 간단히 정리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짧은 사랑은 내 삶에서, 검은 파도에 둘러싸인 작지만 기쁨이 넘쳐나는 섬으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다. 사랑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형편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321쪽)
헬렌은 설리번 없이는 온전한 삶이 불가능했기에 설리번은 헬렌에게 ‘구원자’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저자 도로시 허먼이 지적하듯이 “설리번이 헬렌의 간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면, 헬렌은 설리번의 간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에, 둘은 서로를 구원하면서 억압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갈등의 관계를 다소나마 이완시키고 성찰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역설적으로 설리번이 요양을 가 있던 순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설리번이 폐결핵 진단을 받은 것은 환자 진료기록이 뒤섞였기에 나온 오진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설리번은 스스로 선택한 ‘헌신과 봉사의 삶’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독립적인 관계를 열어 줄 길을 고민할 여지를 찾게 된 것이다.
서로의 ‘의존’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회
우리는 헬렌의 삶을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립생활’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의존하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삶의 구원자이자 독재자였던 설리번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 스스로 사회적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인지 항상 의혹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때로는 헬렌 자신이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성인’(聖人)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헬렌 같은 장애인의 ‘의존’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회가 택하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 바로 ‘시설’이다. 그것은 다른 신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귀찮음’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의존에 대한 거부’와 ‘귀찮음’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철학자 이진경의 말처럼 모든 존재자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야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화폐 지불’로 지워버리며 살고 있을 뿐이다. ‘폐를 끼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존재에 이바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헬렌은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서로를 위해서 삽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함께 있으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358쪽)
어쩌면 이러한 ‘의존의 삶’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데 튼튼한 토양이 되는 사회가 헬렌 켈러, 그리고 설리번이 꿈꾸는 사회였을 것이다. 그 ‘의존의 무게’를 설리번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설리번이 죽기 얼마 전 한 친구는 설리번을 칭찬하려는 뜻으로 그녀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