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대신 ‘장판 밑 벌레’에서 배우라”
- <한겨레> 오피니언넷부문 기자.
당시 부검 입회했던 양길승 녹색병원장이 말하는
91년 5월 분신정국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법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45화 1991년 5월의 죽음, 그뒤 20년
1991년 4월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 뒤 6월 말까지 학생·노동자 등 13명이 차례로 스러져갔다. 박승희(전남대), 김영균(안동대), 천세용(경원대), 김기설(전민련), 윤용하(성남피혁), 김철수(전남 보성고), 이정순(주부), 정상순(보성고 졸업자), 석광수(인천 택시노동자) 등이 분신했다. 박창수(한진중공업)는 구치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김귀정(성균관대)은 경찰의 시위 강경진압 도중 시위대에 깔려 질식사했다. 이른바 ‘분신정국’, 91년 5월 투쟁이다.
양길승(62) 녹색병원장은 당시 강경대씨를 비롯한 희생자들의 사망 원인을 밝히는 사인규명진상조사단에서 활동했다. 스무해 전을 회억하는 그의 미간은 때로 심하게 짜부라져 들었다가 이내 다시 평심을 되찾곤 했다. 그는 의대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뒤 아일랜드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노동자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동에 병원을 열었다. 노동과 건강, 질병에 대한 관심을 여기서 구체화하고 확장했다. 88년 역대 최대의 직업병 사건인 원진레이온 사태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힘은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원진 싸움’은 마침내 원진재단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고, 녹색병원 설립으로 열매를 맺었다.
공교롭게도 ‘직설’을 하기로 한 날 새벽 양 원장의 장인이 세상을 뜨면서 대화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빈소 옆 복도에 놓인 의자에서 진행됐다. 이곳은 강경대씨의 주검이 안치됐던 장소이기도 하다. 묘한 인연이었다.
진행·정리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오늘은 두 털보 사이에 끼었습니다.
한홍구(이하 한) 수염 가닥 수를 보니 도력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서 이 자리가 바로 1991년 강경대 학생이 누워 있던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들머리입니다.
한 91년 5월 투쟁 때 여러번 부검에 참여하셨는데.
양길승(이하 양) 강경대 학생 시신을 이곳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는데, 학생들이 경찰 접근을 막고 있었어요. 검찰 쪽에서 부검을 요구했죠. ‘부검 안 하고도 사인을 규명할 수 있다’며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부러진 갈비뼈가 심장을 싸고 있는 막을 찢는 바람에 그 안에 피가 고여 심장이 멎은 게 나타났어요. 그쪽에서 더는 부검하자는 말을 못했죠.
서 한국의 경우 부검은 검찰 권한인데, 당시에 검찰이 주도하는 부검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심각했습니다. 더구나 경찰에 의한 타살이었잖아요. 부검은 망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전통적 시신관도 있었고.
양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이 있어서 가능했죠.
미스코리아 대회를 보고 밥이 안 넘어가
서 당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와 군부독재의 연장으로 보는 권력 불인정 태도가 팽배해 있었지요. 강경대씨 사망으로 민심은 이쪽으로 급격하게 쏠렸습니다. 문제는 그 뒤 어째서 13번에 걸친 죽음이 있었는가인데.
양 한 시대가 반성하지 않은 걸 ‘직설’에서 하려니 부담스러워지네요.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열리는 때가 있었거든요. 전태일의 경우, 한 사람의 죽음이 10년간 운동을 만들었어요. 91년으로 치자면 4년 전 연세대 이한열 학생의 죽음을 통해 다음 역사를 이끌어갈 힘이 끓어 넘쳤는데, 이걸 남은 사람들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한 시대가 마감됐죠. 결국 그게 많은 죽음을 불러왔다고 생각했어요.
서 우선 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민주진영이 분열된 일을 꼽아야겠죠. 3당 합당(90년)은 상실감의 정점이었지요. 지금 한나라당이 거기서 나온 거죠. 문익환·임수경·황석영 제씨의 방북과 공안통치, 범죄와의 전쟁 선포 등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강권통치에 대한 염증도 컸습니다. 반독재운동 내부에는 ‘이 한 몸 살라’ 식의 고도의 헌신성과 윤리성이 깔려 있었지요. 이런 것들이 엉켜 강경대 학생의 죽음을 계기로 터져 나온 거죠.
한 동구권의 몰락과도 떼서 얘기할 수 없을 겁니다. 국내 정치에선 양김한테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젊은이들은 그걸 넘어서는 비전을 찾는 데 좌절했지요. 이 죽음의 행진이 마지막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기 목숨을 던졌는데… 결국 물살을 멈출 수 없었죠. 연속적으로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참담하게 패배했던…. 어떤 죽음은 세상을 바꿨는데 어떤 죽음은 왜 세상을 바꾸지 못했을까요?
서 91년 투쟁은 6월 항쟁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항쟁으로 헌법은 바꾸었지만 헌법적 가치가 실현되지 못했거든요. 피 흘려 새 헌법을 만들었는데 군부독재가 연장되니, 대중적 좌절과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클 수밖에 없었죠. 다른 한편 대중의 직접투쟁에 기초한 운동이 일정하게 퇴조기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었죠.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강경대씨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명지대에서 유인물 원고를 쓰거나 하다 며칠 만에 학교 앞 밥집에 가서 찌개를 떠먹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미스코리아대회를 하고 있더라고요. 5·18 때는 미스유니버스대회, 밥이 넘어가질 않았죠.
한 91년 이후 김대중씨가 집권하기까지 6년 반밖에 안 되잖아요. 91년은 졌다 하더라도, 그 이후 민주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왜 91년 5월을 지금도 불러내기 힘든 아픈 기억으로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서 현장에서 느낀 건, ‘혁명의 시대’가 끝나는 과정을 보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불밭을 맨발로 달렸던 5월… 그 뒤 마석민주묘역 묘비명을 썼는데,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지어니’라고 새길 때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 많은 사람이 충격받고 상처받은 것이지만,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썼죠. 그것도 하필 <조선일보>에.
양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절창이었거든요. 굿판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좌절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그랬다는 게 충격이었죠. 더 큰 문제는, 그 말이 일정한 울림을 갖고 확산될 정도로 운동이 퇴조기였다는 거죠.
서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던 걸 부인할 수 없어요. ‘죽음의 독점’도 일정하게 있었고요. 그게 이윽고 대중들과 괴리감을 낳고, 그 자리를 ‘굿판’이 타격한 거죠. 한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라는 말을 박홍과 검찰이 써먹고,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 이렇게 됐는데, 가슴 아픈 건 이런 일들이 대중에게 일정 부분 먹혔다는 거죠.
서 잊지 말아야 할 건 그 일로 강기훈씨는 억울하게 옥밥을 3년이나 먹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죠. 그동안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지난해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셨죠.
한 그 어머니가 성공회대에 정식으로 입학해서 제 강의를 들었는데, 아들의 억울함을 풀겠다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중이 돌아서니 모금함도 돌아오지 않더라
한 도대체 패배란 무엇일까요? 양 원장님은 그때 책임있는 장수였잖아요. 힘 대 힘이 총력으로 부딪쳤는데, 무너져가는 대오를 지켜봐야 했던 느낌이 어땠나요?
양 그때 사수대장 했던 서해성 작가하고 1년에 한번은 만나서 술을 먹어요. 그 상처 때문에. 운동을 하다 보면 관성이 생겨요. 어느 한 부분이 닳아져가는 게 있어요. 그걸 깨닫고 눈 돌릴 건 돌리고 과감히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 하죠. 연속되는 죽음을 지켜보면서 멈춰야 한다고 거듭 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죠. 촛불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정도 지나 촛불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는데.
서 시위 현장에서 대중의 지지 강도를 짐작하는 바로미터 같은 게 있습니다. 모금함 10개를 돌려서 모두 꽉 차서 돌아오면 계속 싸움을 해도 돼요. 밀가루 투척사건 터졌을 때 2~3개가 돌아왔어요.(91년 6월3일 정원식 국무총리 내정자가 한국외대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올 때 학생들이 달걀과 밀가루 등을 던진 사건. 언론을 이를 ‘패륜’으로 몰아갔다.) 지하철 시민이 돈을 안 내는 거죠. 모금함 가지고 간 친구도 안 나타나버리고.
양 이거 보면 모금함 돌린 사람들 다 찾아오겠네.
한 그 사람들 이름 이니셜로 내보내.(모두 웃음)
서 ‘패배’로 인상화된 결정적 요인은 정권과 검찰, 언론, 동조 지식인들이 합작해낸, ‘강경대씨 타살정국’이란 수세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공작과 깊게 연관돼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범국민대책회의가 이름은 ‘범’이었지만 투쟁 목표가 공안통치 종식에 그치거나, 민주정부 수립을 내세웠음에도 정작 높은 차원의 투쟁에 주저한 지점입니다.
양 단일한 대오로 가던 운동이 87년 이후 전문 분야별로 재편성돼죠. 역할은 나뉘었는데 이걸 제대로 소화해 이끌어가는 걸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였죠. 전체적으로 오버뷰로 가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단위 속에 침전돼 전망을 보는 부분이 떨어진 지점도 있었죠. 운동이 갈라지면서 그걸 일정한 성장·발전이라 생각하는 쪽도 있고, 생활인이 되어가는 걸 운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91년은 그런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서 양 원장님의 전문 분야 이야기 좀 해보죠.
한 원진레이온 시설이 지금도 중국에서 가동되고 있죠? 중국에서도 환자가 생기고 있는 건가요?
양 일본 도레이레이온에서 쓰던 기계인데, 1930년대부터 미국에서 문제가 돼서 문 닫은 걸 일본이 전후에 가져다 쓰다가 환자가 나오자 중단하고 안 쓰던 겁니다. 그걸 우리가 가져와서 십여년 되니까 환자가 나왔죠. 단둥으로 팔려간 게 93년이니까 20년 가까이 됐죠. 환자가 나올 것 같아서 몇해 전 공장에 들어가 봤어요. 위험한 쪽은 안 보여줘서 제대로 못 봤죠. 위험하다는 말을 중국의 보건복지부 간부쯤 되는 사람에게 했는데 “사람 많은데 (문제가 생기면) 바꾸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장판 아래 벌레를 보고 감수성을 깨우다
서 그 기계를 들여온 게 일제강점기 때 비행기 헌납한 친일파 박흥식(화신백화점주)이죠. 미국, 일본 도레이, 한국의 흥한화섬(원진레이온)을 거쳐 중국 단둥까지 가는 기계의 여정은 ‘노동 식민지가 공해 식민지’라는 걸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경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전형적이죠.
양 비스코스레이온(인조견사)이 양복 안감이거든요. 지금도 일본은 만들어요. 공정을 개선했죠. 우리는 공장을 닫아서 전량을 수입하고 있어요. 지금은 인도·중국에서 많이 만드는데 직업병이 아직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로 흘러간 거죠. 원진 싸움에 대한 여러 소회가 있지만, 어쨌든 원진 피해자를 위한 기념병원(녹색병원)을 만들어낸 건 큰 성과죠.
한 당시 산업재해로 1년에 2000명가량 죽었죠? 지금도 수는 비슷하죠.
양 내용은 달라졌는데, 전엔 직접재해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근래는 심혈관계 이상이 대부분이에요. 즉 업무상 질병으로 죽는 일이 점점 많아져요. 전 같으면 통계에 안 잡혔던 거죠.
서 아덴만 사건 때 총상 입은 선장을 오만까지 날아가 치료했던 이국종 아주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말인데요. 선장이 평소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 중 상위 30% 정도에 드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몸이 기계에 눌리고 잘려 나간 것에 비하면 약과라는 거죠. 노동층은 외상으로 죽을 확률이 사무직보다 20배 이상 높고, 그중에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양 노동과 건강연구회를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산재 발생률은 5분의 1로 줄었어요. 이는 국내 노동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고, 이주노동자 산재 비율은 포함 안 되죠. 이주노동자 재해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해요.
한 노동자가 이렇게 죽어 나가는 건 아무도 관심 안 가져요. 원시적인 산업재해가 줄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겠지만, (쌍용차 구조조정 노동자들처럼) 가족들이 자살하는 건 새로운 현상이죠.
서 고등학생은 입시로, 대학생은 등록금 때문에 한해 200~300명이 죽고 있어요. 자본과 반값등록금 거짓말과 결탁한 미래가 현재를 타살하는 겁니다.
양 우리 사회가 평균으로 보면 많이 좋아졌지만, 일선에서 일하다 보면 심각한 경우를 정말 자주 보게 됩니다. 병원 직원들이 방충망 달아주거나 청소해주는 봉사활동을 나가곤 하는데, ‘평생 그렇게 많은 벌레는 처음 봤다’는 말들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운동권 얘기를 많이 했는데, 미안하지만 분노로 운동하는 시기는 지났어요. 장판 들춰내면 벌레가 바글바글한 걸 봐야지. 새로운 체험을 하고 거기서 새로운 감수성을 늘리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다른 게 안 되요. 감수성이란 건 계속 닳아져가는 거죠. 문제는 닳아져가는 것에만 자꾸 매달린다는 거예요.
한 약발이 떨어져 옛것에 매달릴 때의 특징이 뭐냐면, 더 세게 해요. 사람들은 센 얘기에 질려서 돌아서는 건데.
양 사람 말 들리게 하려면 목소리 낮춰야 되거든요. 소리 높이는 건 자기가 난청 있다는 고백인 거잖아요.
한 어떻게 다시 일어나서 구체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나요?
양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를 87년 만들었는데요. 거기서 제일 먼저 만든 책이 <장애인의 권리>예요. 변호사 단체에서 낼 법한 책인데, 의사단체에서 처음 냈어요. 그게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의미를 던졌다고 봐요. 장애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를 말하자면,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살아보지 못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에요. 장애인과 같이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거예요.
서 엠비는 소통 장애가 있고.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처럼 죽음이 내지르는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거잖아요. 엄청난 청각장애이거나 난청이죠.
한 하나 더 있어요.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장애. 요즘 18번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잖아요.(웃음)
만인이 자연사하는 사회가 민주사회
서 오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죽음이 죽음다워야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죠. 모든 죽음은 사회적이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첫 단락이 이렇게 끝나죠. ‘몇 년 만에 보는 자연사였다.’ 얼마나 많은 타살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죽음이 원통한 사회가 나쁜 사회거든요. 어떤 자살도 타살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법이죠. 만인이 자연사하는 사회가 곧 민주사회인 거죠.
양 죽음을 주제로 말하자면 지금이 그때와 느낌이 비슷해요. 요새 자살이 흔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해서 쌍용차 노동자 분들이 돌아가시는 게 안 드러나고 있는데, ‘쌍용차 싸움’은 보기 힘든 치열한 양상이었어요. 죽기 직전까지 굶었던 기륭전자, 용산은 말할 게 없고. 싸움이 치열한 만큼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있죠.
한 한국 사회가 역사에서도 그렇고 죽음과 대면하는 훈련을 너무 못했어요. 한국전쟁 때의 학살을 봐요. 수십만명이 죽었는데도 내놓고 슬퍼할 수도,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기억할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죠. 죽인 자들만 거룩해졌고. 운동진영 내에서도 그래요. ‘○○○ 등 열사’란 표현도 있잖아요. 한 분 한 분 그 죽음의 의미를 우리가 온전히 간직하지 못해요. 특히 91년 5월처럼 줄초상이 났던 때에는. 시간도 울퉁불퉁한 것 같아요. 20년이라면 아주 긴 시간인데 너무 아파서 그런가, 91년의 죽음을 추모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양 20년을 그대로 비워놓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자기가 흔적을 만드는데, 기가 막힌 건 각주구검이라고 배에다 흔적을 기록하는 이들이 있어요. 자기 혼자 배에다 새김질을 해놓고 그걸 찾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걸 또 반성이라고 해요. 잊히는 건 역사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문제죠. 오늘 참… 희망을 말해야 할 시기에 그렇지 않은 걸 말하는 건 솔직히 피했으면 했어요. 저는 사람들이 다시 강력한 무엇을 찾기보다는 따스함을 찾아 다른 곳에 나누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해요. 20년 만에 이 이야기를 하는 핑계가 그거였으면 좋겠어요.
한 상을 당한 어려운 시간에 너무 아픈 이야기만 여쭤봤습니다.
양 술 먹어야 할 수 있는 얘긴데 맨 정신에 하려니…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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