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2011.07.19 12:52

선녀의 옷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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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네가 골랐니?” 묻자, 미경은 특유의 수줍은 눈을 깜박이며 “으응. 내가 골랐어”라고 답한다.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전동휠체어에 날개를 단 선녀처럼 가볍게 그리고 당당하게 오늘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주인공이 되어 예식장을 들어오고 있었다. 하얀 웨딩드레스 위에서 부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미경은 경기도 어느 시설에서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단 한 번도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어느 햇살 좋은 날, 내가 그녀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아끼는 활동가의 제안에 무조건 만났다. 첫 대면에서 그녀는 예쁜 눈웃음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설은 너무 넓었고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료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시설 밖 세상에 호기심과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마르는 형형색색 빨래가지들을 보며 그녀와 나의 공감대는 옷 이야기로 채워졌다.

 

▲결혼식에서 활짝 웃는 미경씨.


“미경아, 넌 너의 옷을 스스로 시장에서 사 봤니?”라고 물어보니 미경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녀는 시설에서 살았고 나는 집안에서만 살았지만, 우리의 공통점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자기 옷을 선택해서 사 입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요즘 서너 살만 되어도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겠다고 엄마와 투쟁을 시작한다. 분홍색 옷을 입고 유치원에 갔던 아들이 여자라고 놀림 받아 울면서 왔다며 미안해하는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주어지는 대로 입었다. 옷은 때로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우린 아무런 메시지 없이 살았고 그래서 그녀와 나는 옷이 없었다.


2. 내 옷이 아닌 옷

 

나는 25년 동안 집안에서만 살았다. 내 모든 일상용품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다 준 것이었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부족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 옷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 년에 몇 번 명절과 특별한 날에만 새 옷을 받을 수 있었다. 새 옷을 입는다는 설렘은 명절의 즐거움이기도 했고. 기념할 날을 더 특별히 기억되게 하는 촉매 역할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어머니는 같이 입학하는 나에게도 동생과 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주셨다. 이후 학교에 갈 수 없었던 내게도 한동안은 동생과 똑같이 옷을 사주셨다. 그것이 동생과 차별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동생과 다르게 평생을 살아갈 자식에 대한 아픈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학교를 계속 다니는 동생은 옷을 사야 할 일들이 많아졌고 나는 외출이 없다 보니 옷들은 새것인 채로 쌓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옷을 사는 일은 줄어들었다. 동생 옷은 학예회, 학생대표, 소풍, 수학여행, 운동복, 교복, 예복, 한복 등등 용도도 다양하고 세련된 디자인에 색깔도 여러 가지였다. 반면 나의 옷은 집안 생활만 하기 때문에 고무줄 바지, 신축성 있는 니트 종류에 색도 원색 종류로 단순하고 편한 옷이었다. 어머니는 내 피부가 밝아 빨간색이 어울린다며 빨간색 옷을 자주 사오셨다. 가끔 손님이 오시면 그런 옷을 입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했다. 그래도 불평할 생각을 못했다. 나는 학교를 못 다니니까 학교 다니는 동생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편한 옷이라도 어떤 옷이 나에게 맞는지, 내가 무엇을 입고 싶은지 몰랐다.


그런 내게도 옷에 대한 한 가지 기억이 있다. 집안에만 있으면서 라디오 방송에 글을 써 보내 상품 타는 재미를 붙일 때였고, 동네 꼬마들 한글을 가르치며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때였다. 스승의 날, 이른 아침 자기가 제일 먼저 내게 주고 싶어서 줄무늬 팬티에 카네이션 꽃을 들고 달려온 탁희 덕분에 무척 행복했다. 이 이야기를 MBC 라디오 '임국희의 여성살롱’ 프로그램에 보냈더니 그달의 편지로 뽑혔다. 20년 전 20만 원이라는 큰돈에 해당하는 고급 여성의상 상품권을 받았다. 기뻐하는 어머니도 나도 당연히 대학 다니는 동생이 입을 옷이지 내가 입을 옷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나 생각해 본다. 왜 나는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비싼 옷이라서, 필요가 없어서, 어울리지가 않아서. 난 그런 사람이었다. 집에서 동생들 옷을 다리미질해주고, 손질해주고, 동생들 옷 입을 때 이렇게 저렇게 코디해주고, 동생들이 예쁜 모습으로 나가면 혼자 즐거웠다. 반면 동생 교복을 다리면서 나는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허탈한 심정, 정장을 차려입고 몇 번이고 예쁘냐고 나에게 확인하고 또 하며 상견례 나가는 동생을 보며 들었던 허전한 심정, 동생이 입을 웨딩드레스 사진을 보며 고르고 또 고르고. 그러나 정작 동생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친정 언니가 장애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누구도 내가 부끄럽다고 말하지는 않아도 특별한 날에는 나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결혼식은 양쪽 집안의 자랑스러운 자손들이 등장해야 하는 자리이고 나란 존재는 드러내기 싫은 존재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분위기로 느꼈다. 그래서 눈치껏 했지만 그럴 때는 목에 뭔가가 걸려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알아서 포기하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가 덜 되기 위해서라지만 실은 더 깊은 상처가 된다. 동생들 결혼식에 예복들을 준비한다고 집안이 어수선해지면서 나는 제외되었다. 이미 이때부터 나는 이 잔치에 참여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궁색한 변명, “여동생이 결혼할 때 결혼 안 한 언니는 안 가는 거라서….” 이런 잔치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침묵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3. 날개는 없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외출할 때면 변변한 옷 하나가 없었다. 언젠가 성당 가는 날, 가볍고 따뜻한 옷이라고 초록색 앙고라실의 스웨터를 입고 갔다. 그런데 비슷한 스웨터를 할머니들이 입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 옷을 내가 입고 있다는 것이 상처가 되었다. 어머니는 따뜻하고 가벼운 것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도 젊은 여성이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 못하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동생이 대학생이 되자 화장품과 미니스커트 정장과 구두도 사주셨다. 그렇게 어머니에게 동생은 여성으로 성장해 갔지만, 나는 여전히 여성이 아니라 최대한 편한 것이 우선인 장애가 있는 자식이었다.


외출이 조금씩 늘어나자 옷에 대해 관심도 켜져 갔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제한되어 있었다. 젊은 여성으로서의 내 개성과 취향, 선호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1980~90년대 거의 모든 중증 지체장애인들은 수동휠체어를 탔다. 장애여성들도 이동할 때면 항상 남성봉사자들에게 안기거나 업혀야만 했다. 어느 모임에서였다. 뇌병변 장애여성이 날씬한 몸매를 잘 살려주는 짧은 원피스 치마에 높은 구두를 신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너무 멋있었다. 부러웠다. 이렇게 입고 나올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그런데 그녀가 차를 타기 위해서는 남성봉사자에게 업혀야 했다. 치마가 올라가고 봉사자는 어디를 잡아야 할지, 서로 무척 불편했다. 그녀가 떠나자 사람들 말이 많아졌다. ‘주제에 그런 옷이냐’,‘ 저런 옷 때문에 무슨 일들이 생긴다’,‘ 장애인은 절대 저런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저런 옷을 입고 나올 생각을 한 것 보면 정신상태도 이상할 것이다’ 이러한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 광경은, 그 말들은 내 뒤를 질기게 따라다니며 옷에 대한 억압이 되었다. 마치 나는 절대 이런 말을 듣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여성스러운 옷들을 포기했다. 휘어진 허리와 장애가 드러나지 않을 큰 남방, 앉아 있기 때문에 서 있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목까지 단추 꼭꼭 잠그기, 아무리 더워도 속옷은 두껍고 긴 소매였다. 언제 업히고 안길지 모르기에 항상 바지였다. 마치 봉쇄 수도원의 복장과 같았다. 살아남기 위한 무장된 자세, 장애인으로서 자기주제를 잘 알고 있는 자세.

 

4. 그런데 날개가 있더라


1997년 국제장애여성 리더십포럼이 워싱턴에서 열렸다. 82개국 장애여성들이 하이야트 호텔 안에서 복작거리며 모였다. 좁은 공간 안에 그렇게 많고 다양한 장애여성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저 놀라웠다. 또한 세계 장애여성들의 자유로운 의상도 놀라웠다. 다양한 전동휠체어들은 마치 전시장 같았고 그 자체로 개성 있는 패션의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프리카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율동과 함께 화려한 수공예 작품들이었다. 버클리대학교 학생이라는 한 장애여성의 패션은 정말 신기했다. 몇 겹으로 땋아 올린 머리에 인디언 같은 화장, 치렁치렁한 옷맵시와 어울리는 전동휠체어는 그 자체로 참 당당했다.


우리나라 대표단의 휠체어는 모두 수동이라 항상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모습도 활동도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보기에도 의존적으로 보였다. 우리 복장은 멋스러움보다는 활동하기 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의수를 하고 있어도 민소매 옷을 입었고, 보조기를 하고 있어도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휠체어에 앉아 있어도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거침없이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장애가 있는 몸을 억압하지 않는, 개성을 맘껏 살리는 패션이 신선했다. 무엇보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리프트 차량으로 이동하는 그녀들은 옷맵시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동휠체어라면 봉사자들에게 업히지 않아도 되고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원하지 않는 타인과의 접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동휠체어가 절실했다. 장애인 입장에서의 테크놀로지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장애가 개성과 취향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 몸에 뭘 그렇게 멋을 내려고 해, 자기 주제를 봐.’라고 내가 스스로 했던 말. 지금에서야 사회의 차별로 만들어진 장애가 나를 억압한 결과임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곳 몇 나라의 장애여성들이 자유로워 보일 뿐이었다. 나와는 다른 무엇, 설명할 수 없었던 그것은 생존의 요구를 넘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였다. 아프리카 장애여성들은 당장 굶어 죽어간다고, 아시아 장애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맞아 죽어간다고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서구 장애여성들의 자유로움이 사치일 수도 있었지만, 일정 정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에서 다양한 사회적 지원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5. 과연 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애써 찾아보자면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림 그리길 좋아했고, 하늘의 다양한 색을 표현하고 싶었고, 산과 들녘의 색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잠깐의 꿈으로 끝났다. 이후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구상하고, 종이를 묶어 그림을 그리고, 어설픈 책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면 재미있다고 칭찬해줘 한동안 우쭐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 패션 디자인이었다.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우면서 여러 가지 천으로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기 시작했다. 여성잡지를 보면서 패션에 관심이 커졌고, 새로운 디자인을 발견하는 것이 즐거웠고, 연구하고 만들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상상하고, 자르고, 꿰매고, 뜨개질하고. 자로 재거나, 세밀하게 도안하거나, 계산하거나, 그런 정확하게 하는 것 하나 없이 그리고 재봉틀 하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주먹구구로 여러 가지 인형 옷들을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동생들 옷도 만들고, 옷 수선도 할 수 있게 되면서 어머니를 놀라게 해 드리기도 했다. 사람들 옷 입은 것을 보면서 혼자 평가도 해보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지만 사람마다 가진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 세상과 소통을 잘하는 것이 좋은 패션이라는 나름의 패션관도 생겼다. 이러다 보니 여러 가지 소재와 다양한 도구들이 필요해져서 점점 짐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잦은 이사 속에서 하나 둘 버려지는 짐처럼 재미있고 신 나던 꿈도 사라져 갔다. 이제는 다시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작년에 퀼트를 잠깐 하면서 상처투성이인 내 마음을 치유하고,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는 기쁨,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소중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올여름 커튼을 예쁘게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는데 못 이루고 이 여름을 보낼 것 같다. 잠시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제는 어설펐던 그 꿈은 나의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는 정도로 해결하고 있을 뿐이다.


6. 비행을 꿈꾼다


1997년 독립해 고덕동에 살기 시작하면서 매 순간이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나 혼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수동휠체어를 탈 때에는 나 혼자 밀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늘 필요했다. 언제부턴가 전동휠체어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2000년에 전동휠체어를 가지게 되면서 내 활동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30대 후반 생애 처음으로 혼자 쇼핑센터에 갔다. 내 옷을 처음으로 산 것이었다. 너무 많은 옷들. 멋있고 예쁜 것도 많지만 나에게 무엇이 맞는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격도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도 몰랐다.


조금 살펴보려고 하면 직원이 나와서 옆에 서 있으니 눈치가 보여 빨리 사거나 아니면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아 잘 살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살펴보고 있는데 직원이 나와 보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천종류는 무엇인지, 바느질은 어떤지, 손님으로서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발전했다. 그렇게 옷을 사면서 갈수록 옷 고르는 요령이 생겼다. 직원이 아무리 나에게 사이즈와 색이 잘 어울린다고 바람을 잡아도 나에게 맞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리고 나한테 색과 디자인이 편안해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다. 이러한 것도 실패를 거듭해 보면서 터득해가는 것이다.


장애인운동을 하다가 정치영역에 입문하고 보니 그곳은 정장을 입는 분위기였다. 특히 지도부 위치에 있으면 정장이 예의다. 그런데 반듯하지 않고, 휘어진 허리에 어깨가 올라간 나의 몸에 각지고 라인이 들어간 여성정장은 맞는 것이 없다. 나는 앞에 지퍼가 있는 옷과 누빔이 많은 옷, 너무 두꺼운 외투, 허리가 짧은 옷은 입을 수가 없다. 앉은 자세 때문에 옷이 위로 올라가서 마치 럭비선수 같은 모양이 된다.


그래서 요즘은 가장 편한 생활 한복을 즐겨 입게 된다. 나이 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편한 옷이 좋다. 멋있는 불편보다 나만의 멋이 있는 편한 옷을 찾게 되는 것이다.

 

7. 선녀, 여기에 살다


최근 탈시설을 실천한 장애인들과 가까이 지낼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장애여성들은 시설에서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옷도 달라진다. 자기 개성을 찾기 시작한다. 처음 시설을 나왔을 때 원색에 예쁜 옷만 입지만 점차 자기에게 맞는 옷을 찾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사회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원색에 레이스 달린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장애여성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반말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함부로 머리를 만지거나 손을 댄다. 일일이 기분 나쁘다고, 하지 말라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래서 옷으로 무언의 긴장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옷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들에게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보라고 권한다. 사회에서 약자에게는 옷이 또 하나의 무장이 될 수 있고 정치행위가 되기도 한다.


미경이 스스로 고른 웨딩드레스는 그녀 삶의 반전이자 앞으로 수많은 선택이 놓여 있는 삶의 시작이다. 자기 옷 하나 고를 수 있는 선택권조차 박탈당하며 살아왔던 미경과 나는 이제야 선택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삶이란 가끔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옷을 자기가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결혼식에 갈 때, 상가에 갈 때, 여행을 갈 때, 직장에 나갈 때,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역할이 있고, 사소한 것 같은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러한 일상을 할 수 있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경이의 맑은 미소가 참 행복해 보인다. 미경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에 더 좋아 보인다. 미경은 이제 자기 옷뿐만 아니라 소중한 남편을 위한 옷도 고를 것이다. “아름다운 미경, 파이팅!”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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