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미각지당 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계전오엽 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이 시는 송나라의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憙)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연못가에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잎이 가을을 알린다.’
학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학문을 열심히 익히라는 권고의 시구로서 배움에도 때가 있으니 젊은 시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네 구가 각각 독립된 명구로 세월의 덧없음과 시간을 아껴 학문에 임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양지비전센터에 근무하는 탁정호씨는 이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연못가의 풀이 마르거나 오동잎이 떨어지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그럼에도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완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탁정호(1958년생)씨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강원도 태백시 금천동에 살았다. 아버지는 황지에 있는 장선광업소에 나가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셨다. 그가 어릴 때 듣기로는 모두 십남매였는데 둘은 그만 잃어버리고 팔남매가 살았는데 그는 여섯째라고 했다.
그는 첫돌이 지나서도 잘 걷지를 못해 한쪽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지만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필자가 알기로 소아마비는 고열이 나기 마련인데 그 열병을 조그만 아이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 앓으면서 견뎌 냈다니.
“소아마비가 유행을 했는지 동네에서는 저 말고 두 명이나 더 있었지만 저는 병원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이 많으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였죠.”
아버지가 직장은 있었지만 식구들이 많았기에 집은 가난했고, 어머니도 그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한쪽 다리를 쩔뚝거리면서도 동네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시골 광산촌에서 함께 자라는 아이들은 그의 다리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여덟 살이 되어 태백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가 사는 금천동에서 학교가 있는 계산동까지는 5리(2km)쯤 되었다. 그 먼 길을 어린 아이가 책보를 둘러메고 다리를 쩔룩거리면서 다녔던 것이다.
“강원도는 워낙 춥고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는 학교에 못가는 날이 더 많았어요.”
그래도 학교에 가면 강냉이 죽을 주었고 나중에는 강냉이 빵을 주었는데 빵은 책보에 싸서 집에 가서 동생들 하고 나눠 먹었단다.
“동네 친구들은 함께 어울렸다 해도 학교에서는 절름발이라고 놀리지 않았어요?”
필자가 어린 시절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처음에는 간혹 놀리는 애들이 있었지만 그는 짱돌 던지기 선수였단다.
“누구든지 놀리기 만하면 짱돌(작은 돌멩이)로 복숭씨를 맞췄어요. 나중에는 애들이 겁이 나서 안 놀렸어요.”
그가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것도 3년 만에 끝이 났으니 집 앞에 금천분교가 생겼던 것이다.
“금천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었는데 선생님을 생각하면 잘해준 것보다는 혼이 났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여학생들의 고무줄을 끊고 공기놀이를 방해하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겨울이면 난로위에 쫀드기를 구울 때 장난치는 등 개구쟁이였단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그를 강하게 하려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시킨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예 반에서는 붓글씨를 썼는데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아버지가 안동 양반가문 출신인데 형제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태백으로 왔지만 양반기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한학공부와 붓글씨를 썼어요.”
아버지 옆에서 먹도 갈고 붓글씨도 쓰고 자전에서 한자도 찾아주면서 자연스레 한문도 배우게 되었다. 공부도 잘했기에 장래에 대한 희망도 컸다. 그는 판검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백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태백기계공고에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지만 왠지 공고는 가고 싶지 않았다.<2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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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미각지당 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계전오엽 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이 시는 송나라의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憙)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연못가에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잎이 가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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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비전센터에 근무하는 탁정호씨는 이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연못가의 풀이 마르거나 오동잎이 떨어지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그럼에도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완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탁정호(1958년생)씨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강원도 태백시 금천동에 살았다. 아버지는 황지에 있는 장선광업소에 나가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셨다. 그가 어릴 때 듣기로는 모두 십남매였는데 둘은 그만 잃어버리고 팔남매가 살았는데 그는 여섯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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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가 유행을 했는지 동네에서는 저 말고 두 명이나 더 있었지만 저는 병원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이 많으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였죠.”
아버지가 직장은 있었지만 식구들이 많았기에 집은 가난했고, 어머니도 그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한쪽 다리를 쩔뚝거리면서도 동네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시골 광산촌에서 함께 자라는 아이들은 그의 다리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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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 워낙 춥고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는 학교에 못가는 날이 더 많았어요.”
그래도 학교에 가면 강냉이 죽을 주었고 나중에는 강냉이 빵을 주었는데 빵은 책보에 싸서 집에 가서 동생들 하고 나눠 먹었단다.
“동네 친구들은 함께 어울렸다 해도 학교에서는 절름발이라고 놀리지 않았어요?”
필자가 어린 시절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처음에는 간혹 놀리는 애들이 있었지만 그는 짱돌 던지기 선수였단다.
“누구든지 놀리기 만하면 짱돌(작은 돌멩이)로 복숭씨를 맞췄어요. 나중에는 애들이 겁이 나서 안 놀렸어요.”
그가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것도 3년 만에 끝이 났으니 집 앞에 금천분교가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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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의 고무줄을 끊고 공기놀이를 방해하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겨울이면 난로위에 쫀드기를 구울 때 장난치는 등 개구쟁이였단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그를 강하게 하려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시킨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예 반에서는 붓글씨를 썼는데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아버지가 안동 양반가문 출신인데 형제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태백으로 왔지만 양반기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한학공부와 붓글씨를 썼어요.”
아버지 옆에서 먹도 갈고 붓글씨도 쓰고 자전에서 한자도 찾아주면서 자연스레 한문도 배우게 되었다. 공부도 잘했기에 장래에 대한 희망도 컸다. 그는 판검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백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태백기계공고에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지만 왠지 공고는 가고 싶지 않았다.<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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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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