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선배를 만났다. 양동식 선배가 남포동 제화점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제화기술을 배워보라고 했다.
선배의 권유로 제화점에 취업은 했지만 신발은 신는 것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모른 채 시작했다. 선배의 지도로 갑피기술을 배우며 가죽을 깎고 다듬었는데 일을 잘 못해서 야단맞고, 가을이면 며칠씩 결근을 해야 했기에 야단을 맞아야 했다.
김해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가 바쁜 추수철이면 그를 불렀는데 그는 차마 어머니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못해서 벼를 베러 갔던 것이다.
선배의 권유로 제화점에 취업은 했지만 신발은 신는 것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모른 채 시작했다. 선배의 지도로 갑피기술을 배우며 가죽을 깎고 다듬었는데 일을 잘 못해서 야단맞고, 가을이면 며칠씩 결근을 해야 했기에 야단을 맞아야 했다.
김해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가 바쁜 추수철이면 그를 불렀는데 그는 차마 어머니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못해서 벼를 베러 갔던 것이다.
남포동 제화점에는 대연동 누나 집에서 다녔는데 7명의 직원 중에 3명이 농아였다. 구두는 발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에 발을 담았을 때 최대한 발이 편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갑피는 소가죽이나 양가죽 등을 주로 사용했는데 갑피와 내피를 뜨고, 모양과 무늬를 만드는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그렇게 지내면서 구두기술도 배우고 아내도 만났다.
아내 권미자(1963년생)씨는 친구를 만나러 갔던 농아교회에서 처음 만났으며 그는 27살이고 아내는 20살이었다. 당시 아내는 고무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만난 지 석 달쯤 지나자 아내가 헤어지자고 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일 것 같은데 헤어져서 좀 슬펐습니다.”
권미자 씨와 헤어져서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견뎌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데 1년쯤 후에 용두산 공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권미자 씨는 그와 헤어진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주변의 가족들이 이경희 씨 만한 사람이 없다며 권미자 씨를 나무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이경희 씨의 어머니가 궁합이 좋다고 해서 1985년 신랑 이경희와 신부 권미자는 결혼식을 했다. 결혼을 하고 주례동 전세방에 살았는데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용철(27살)을 낳았다.
대부분의 농아 부부들이 밤에는 아이들이 울어도 잘 듣지 못하므로 잘 때는 아이와 부모의 손목을 끈으로 묶어 두기도 하는데 권미자 씨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아내 권미자(1963년생)씨는 친구를 만나러 갔던 농아교회에서 처음 만났으며 그는 27살이고 아내는 20살이었다. 당시 아내는 고무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만난 지 석 달쯤 지나자 아내가 헤어지자고 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일 것 같은데 헤어져서 좀 슬펐습니다.”
권미자 씨와 헤어져서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견뎌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데 1년쯤 후에 용두산 공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권미자 씨는 그와 헤어진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주변의 가족들이 이경희 씨 만한 사람이 없다며 권미자 씨를 나무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이경희 씨의 어머니가 궁합이 좋다고 해서 1985년 신랑 이경희와 신부 권미자는 결혼식을 했다. 결혼을 하고 주례동 전세방에 살았는데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용철(27살)을 낳았다.
대부분의 농아 부부들이 밤에는 아이들이 울어도 잘 듣지 못하므로 잘 때는 아이와 부모의 손목을 끈으로 묶어 두기도 하는데 권미자 씨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당연히 밤에 잘 때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아기가 심하게 울고 보채면 옆집에서 듣고는 문을 두드렸는데 아기의 울음소리는 잘 듣지 못했지만 쾅쾅쾅 하는 문소리는 울림 때문인지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기가 첫돌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피곤했는지 낮잠이 들었는데 아기가 아장아장 혼자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내와 저는 정신없이 아이를 찾아 다녔는데 다행히 아이는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한번 잃어버리고는 너무 놀랐고, 아이를 잃어버린 원인이 듣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인 것 같아서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 무렵 그는 제화점을 그만두고 동일화성에서 운동화를 만들었는데, 아이가 시어머니와 살게 되자 아내도 다시 직장을 다녔다. 어머니도 김해의 농사를 정리하고 덕천동에서 큰형과 살았고 그도 덕천동 어머니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아내와 저는 정신없이 아이를 찾아 다녔는데 다행히 아이는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한번 잃어버리고는 너무 놀랐고, 아이를 잃어버린 원인이 듣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인 것 같아서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 무렵 그는 제화점을 그만두고 동일화성에서 운동화를 만들었는데, 아이가 시어머니와 살게 되자 아내도 다시 직장을 다녔다. 어머니도 김해의 농사를 정리하고 덕천동에서 큰형과 살았고 그도 덕천동 어머니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1993년 동일화성이 부도가 났고, 마침 농아들의 호떡장사가 유행이었다. 기름 없는 옛날전통호떡이라고 했는데 선배들한테 기술을 배워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호떡장사를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한 선배가 청룡동에 구두터가 났다고 했다.
“처음 구두터를 봤을 때 장사가 될까 싶어 의심스러웠지만 구두기술이 있으니까 기술을 믿고 시작했지요.”
이경희 씨는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입구 사거리 근처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경희 씨를 찾았을 때 그의 구두터는 여름 오후의 햇살에 온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건너편 그늘이 진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인터뷰를 하다 보니 등 뒤에 ‘성진인테리어’라는 벽지집이 있었다. 가게에 좀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이경희 씨는 그제야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벽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벽지집 테이블에 앉아서 인터뷰를 계속했다.<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 구두터를 봤을 때 장사가 될까 싶어 의심스러웠지만 구두기술이 있으니까 기술을 믿고 시작했지요.”
이경희 씨는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입구 사거리 근처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경희 씨를 찾았을 때 그의 구두터는 여름 오후의 햇살에 온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건너편 그늘이 진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인터뷰를 하다 보니 등 뒤에 ‘성진인테리어’라는 벽지집이 있었다. 가게에 좀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이경희 씨는 그제야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벽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벽지집 테이블에 앉아서 인터뷰를 계속했다.<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