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장애인부모로 살아가는 건 어떤 모습일까? 장애가 있는 자녀의 성장과 함께 변해가는 부모의 삶에 초점을 맞춰 그 속살을 들여다봤습니다. 비마이너는 장애아를 키우는 어머니, 아버지 네 분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 ▲생후 3개월 수준의 인지능력을 가진 딸 서영이를 '엄마처럼' 돌보는 아빠 김재형 씨. ⓒ김윤섭 |
세상을 바꾸려면 가족이 먼저 바뀌어야
다른 장애인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발달장애인의 삶에서 가족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가족들의 장애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사회도 바뀌지 않는다. 아내의 대인기피증을 경험하면서 김재형 씨는 장애인 가족 구성원들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그래서 부모회 중점사업도 장애인 가족의 자존감 찾기로 설정한다.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현규(14세)에게 서영이의 장애를 이렇게 설명해 왔다. “누나는 ‘생각 주머니’가 작은 것뿐이야” 가족들과 외출할 때 곁눈질로 서영이를 쳐다보는 애나 어른이 있으면 김재형 씨는 참지 않는다. 휠체어를 코앞까지 들이밀고 “곁눈질하지 말고 정면으로 보라. 우리 서영이는 생각주머니가 좀 작은 것뿐이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엄마 아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현규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누나한테 인사부터 시킨다. “야, 서영이 누나야. 인사해” “이상하지? 누나는 생각주머니가 작은 것뿐이야.” 김재형 씨는 그런 현규를 위해 친구들이 좋아하는 돈가스나 짜장면을 만들어 준다. 현규의 여자친구들도 서영이를 “언니, 언니” 하면서 따른다. 김재형 씨 가족은 철마다 여행을 간다. 물론, 서영이 전담 마크맨은 김재형 씨지만 그래도 가족들은 서영이 때문에 여행이 방해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서영이도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다.
당사자?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다
서영이가 장애를 갖게 된 후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냐는 질문에 김재형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애? 괜찮은 거 같아요. 장애인 가족이라고 불행한 건 아니에요. 저는 지금 참 행복합니다. 서영이가 웃을 때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서영이의 자립생활에 관해 목표하는 바가 뭐냐고 물었다. 지금은 꾸준한 물리치료를 통해 손잡고 걸음마 떼는 정도인데, 혼자 걷게 하는 게 목표냐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혼자 걷는 걷게 돼도 사실, 문제예요. 더 큰 장애에 부딪힐 수 있어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재활’이나 ‘자활’이라는 프레임으로 장애인의 몸과 삶을 재단해 왔다. 혼자 걷고, 혼자 밥 해먹고 혼자 사회 생활하는 것, 비장애인의 삶을 장애 극복의 목표로 삼아온 것이다. 시청각 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은 보조기기의 발달과 제도개선으로 일정 수준 가능하겠지만, 서영이 같은 발달장애인들에게 재활과 자활의 목표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이 지점에서 김재형 씨는 지체장애인 중심 장애인운동의 한계에 목소리를 높였다.
“자립생활? 물론 좋죠. 하지만 그건 발달장애인에게는 그리 맞지 않는 운동 목표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 하면 발달장애인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하면 시청각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을 떠올리죠. 그래서 장애인운동이 ‘당사자주의’나 ‘자활’ 담론에서 못 빠져나오는 면이 있어요.”
‘당사자주의’는 비단 장애인운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용산 남일당, 홍대 두리반, 명동 마리 같은 재개발반대 싸움에도, 김진숙의 정리해고 반대 싸움에도 당사자주의는 가장 큰 운동의 장애물이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연대는 모두 불순한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낙인찍힌다. 장애인의 권리는 장애인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의 권리이자 우리 사회의 온갖 진입 장벽에 가로막힌 사람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세상은 해고자들에게도, 철거민들에게도, 노동자들에게도, 그 외 우리 사회 99%의 사람들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연대는 동정심이나 정의감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한 절박한 결합이다.
‘당사자주의’는 자기 결정권을 가진 독립된 개인이라는 근대 신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장애인들도 온갖 종류의 외부 조건, 타인의 간섭, 사회적 편견과 이데올로기, 대의제도에 의해 온전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지 않는가? ‘자기결정권’이란 타인의 지배를 억제하기 위한 권리일 뿐, 결사의 자유와 공동체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활’ 담론도 마찬가지다. 개별적 ‘자활’이란 신화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은 한순간도 고립된 개인의 삶이 아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온갖 종류의 공동체적 삶이다. 따라서 자립생활의 주체는 결코 ‘개인’일 수 없다.
![]() ▲재형 씨는 장애인운동이 '당사자주의', '자활' 담론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발달장애인의 삶과는 맞지 않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김윤섭 |
서영이의 가족공동체를 위하여
김재형 씨는 말한다. 발달장애인들이 자기 의사를 또렷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지는 못해도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라고.
“서영이 같은 발달장애 청소년들끼리도 더디지만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서로 소통하고 의견 수렴을 하기도 해요. 다음 주에 뭘 할지 결정하라고 하면 영화 보러 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등 이런저런 의견을 내고 의견을 모으기도 해요.”
다른 발달장애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김재형 씨는 서영이의 미래를 그 아이들의 미래와 함께 그린다.
“지금 집을 기부채납이라도 해서 그룹홈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공동으로 평생 살 집을 만들어 주는 게 제 꿈이에요”
조심스럽게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서영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혹시 시설 생활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느냐? ‘좋은’ 시설은 어떠냐?” 그랬더니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우리가 죽고 나면…” 김재형 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곧이어 그는 단호하게 “좋은 시설은 없어요. 시설은 시설일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최고로 좋은 시설도 가 봤다고 한다. 건물도 잘 지어 놓고 장애인 편의시설도 잘 돼 있다. 강당도 넓고 프로그램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잘 갖춰지면 뭐해요? 결국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수용되는 삶인 걸요. 장애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도 있더군요. 하지만 누가 거기까지 가서 장애인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겠어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것만 못해요”
개별적인 자립생활도 불가능한 발달장애인에게 유일한 대안은 공동체 주거뿐이다. 발달장애인들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서영이처럼 인지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도 있고, 다운증후군처럼 비장애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공동 주거를 하며 가족처럼 사는 게 김재형 씨가 꿈꾸는 서영이의 독립이다. 꼭 피를 섞어야만 가족이 아니다.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그게 가족이 아닌가? 김재형 씨가 장애인부모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서영이에게 그런 대안 가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당연히 이런 ‘그룹홈’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활동 보조도 필요하고 Job Coach(잡코치·직무지도사)도 필요하다. 의료지원, 교육지원, 상담지원도 필요하다. 지금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정부에 요구하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지원에 대한 정책들은 곧 미래의 장애인 대안 가족들을 위한 지원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다.
장애인들끼리, 혹은 비장애인과 더불어 자율적인 주거공동체를 만들고 시민사회와 정부가 옆에서 지원한다면, 자신과 아내가 죽고 없는 서영이의 미래도 어둡지만은 않으리라. 김재형 씨가 꿈꾸는 서영이의 미래는 곧 내가 꿈꾸는 매이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서영이가 평생 살 수 있는 주거공동체를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는 김재형 씨. ⓒ김윤섭 |
![]() ▲김재형 씨가 장애인부모운동에 매진하는 건, 부모가 죽고 난 뒤에도 아이가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김윤섭 |
*글쓴이 박정수 님은 현재 수유너머R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G20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은 그라피티 작가이기도 합니다. 사진 찍은 김윤섭 님은 몇 해 전까지 국가인권위원회가 펴내는 월간 <인권>의 사진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사진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박정수 lizom@hanmail.net <script type="text/javascript">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