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는 장애인에게 모욕을 주는 제도였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복지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자신의 못남을 호소해야 했다. 그렇게 받아낸
서비스마저 삶을 온전히 지탱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고, 어떤 이들은 그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다.
그나마 올해 정부가 장애등급제를 개편하는 안을 내놓으면서 장애등급제를 바꿀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는 듯했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는
장애인계의 수년간 요구에 따른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장애인들의 기대를 충족하긴 어려운 방안이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이 정도 개편안으로는 장애인 대중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이에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장애인들의 활동은 올해에도 뜨거웠다.
올해로 1000일과 3주년을 맞이한 광화문역 농성이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것에 더해, 장애등급제를 과거의 유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활동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지난
5월부터 전국 곳곳의 도로를 점거하는 '그린라이트' 활동이 전개됐다. 장애인들은 이를 통해 장애등급제 폐지 등을 위한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했다.
정부의 장애등급제 개편안, ‘장애등급제 시즌 2’?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 장애인계와 간담회에서 ‘장애등급제 개편 시범사업 계획안’(아래 개편안)을 공개했다. 이 개편안은 장애 등급이
단순화되고, 서비스 전달체계에도 개인별 지원계획이 포함되는 등 현행 장애등급제와 외형상 차이를 두고 있다. 이 개편안은 올해 하반기 6개
지방자치단체 시범사업으로 적용됐으며, 내년 10개 지자체 시범사업을 거쳐 2017년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개편안을 보면 기존 여섯 개의 등급이 중증과 경증 두 개로 줄어든다. 의학적 평가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는 별도의 판정 도구가
적용된다. 서비스 전달체계는 국민연금공단 산하 장애인지원센터에서 개인의 장애 정도와 서비스 필요도 등을 조사해 개인별 지원계획을 수립하는
방식으로 변한다. 지자체는 이 지원계획을 심의 후 의결하는 식이다. 바우처 서비스의 경우 중장기적으로 바우처를 통합해 서비스별 수량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그러나 개편안이 실제로 장애등급제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인지는 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여전히 중증과 경증으로 장애 등급이 나뉘며,
일부 서비스를 제외하면 기존 장애 등급을 평가하던 의학적 평가 기준이 적용된다. 사회적, 환경적 요인을 일부 고려한 다른 장애 평가 기준들은
평가가 어렵다는 이유로 적용하지 않았다.
즉 지금처럼 신체 손상만을 따져 등급을 매기고, 장애 1급에서 3급, 혹은 중복 3급까지 중증, 나머지 등급을 경증장애인으로
분류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물론 개편안에는 ‘장애등급 폐지에 대한 여론이 성숙되면’ 장애등급을 완전 폐지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기는 했다. 그러나 정부가
판단하기에 ‘여론이 성숙되는’ 시기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10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은 정부의 장애등급제 개편 방안에 반발해 연구 설명회 장소를 점거하고 이를 무산시켰다. 이 당시에도 복지부
방안이 소득보장과 예산 확보 등 근본적으로 장애등급제를 대체할 방안은 없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나마 서비스 전달체계의 경우도 서비스 수량의 절대 부족으로 제대로 작동하길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장애인 복지서비스는
감면·할인제도와 민간 지원을 제외하면 활동지원, 장애인연금 등 일부 서비스 뿐이다. 최중증장애인이라고 해도 활동지원 24시간을 받을 수 없으며,
많은 장애인이 활동지원 시간 부족을 호소하는 형편이다. 장애인연금도 생활비 하기에도 벅찬 20만 원 남짓을 중복 3급까지 소득 하위 70%에게만
주고 있다. 서비스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달체계 개편에 맞게 서비스 수량을 증대하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당장 계획안에서도 중증, 경증이라는 등급으로
저지선을 쳐, 기존 1~3급 장애인에게만 지급됐던 서비스를 경증장애인까지 확대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보였다.
오히려 지방정부의 활동지원사업, 소득보장사업 등이 중복사업이라며 정비를 촉구하는 등 복지 재정 동결 내지 축소를 지향하는 정부가
서비스 수량 증대에 필요한 만큼 예산을 확보하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참고로 2016년도 복지부 장애인 관련 예산은 약 1조 9090억
7800만 원으로 올해 1조 8816억 3600만 원보다 274억 4200만 원(1.5%) 늘어나는 데 그쳤다.
결국 서비스 양을 확대하기 위한 예산이 없다면 개인별 지원계획은 원하는 서비스를 개인에게 묻되, 정작 필요한 서비스는 주지 않는
‘희망 고문’식 전달체계일 뿐이다. 또한 한정된 예산으로 서비스를 전달하려면 장애인지원센터와 지자체, 복지부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따지고 물으며
서비스가 필요한지 까다롭게 검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의 개편안은 과정만 더 복잡해질 뿐, ‘부족한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나눈다’는 명목으로 장애 정도를 엄격하게 따져 물었던
장애등급제의 ‘시즌 2’에 지나지 않는다. 장애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지 않을 뿐, 장애등급제가 작동하던 배경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린라이트’와 장애인권리보장법으로 맞선 장애인들, 장애등급제 폐지 이뤄낼까?
정부 개편안이 장애등급제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 보루인 광화문역
농성장이 이후 현재까지 1200여 일이 훌쩍 넘는 기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동안, 올해도 장애인들은 거리 곳곳에서 싸우곤 했다.
광화문역 농성 1000일이었던 지난 5월 17일부터 농성 3주년인 8월 21일까지 95일간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가 장애인들에게
드리운 빨간불을 ‘그린라이트’로 바꾸자며 거리를 점거했다. 지난해까지 장애등급제 폐지 요구의 목소리는 주로 복지부를 향했지만, 복지부는 전체적인
정부부처의 장애인 관련 사업을 총괄하지 못해 사실상 등급제 개편의 주무부처로서 기능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에 ‘그린라이트’ 행진 대열은
복지부 대신 국무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지난
9월 추석 당일에 장애인단체 활동가들이 총리 공관에 나와 면담을 촉구한 모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들의 요구는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의지는 물론 권한도 없는 복지부 대신, 정부 부처를 총괄하는 국무총리 산하에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기구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교안 국무총리는 지난 6월 취임 당일 장애인들의 면담 요구를 묵살했다. 하지만 이들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총리 공관을 찾아와 등급제 폐지 요구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함께 장애계는 장애등급제를 대체할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도 지속해 갔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장애등급제의
의료적 관점을 탈피하고 장애인 소득 보장과 서비스 확대 등을 수반한 복지전달체계와 개인별지원계획을 구축하려 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돕는 체계를 만들고 장애인의 권리옹호체계를 수립하는 내용도 담았다.
내년에도 정부의 개편안은 차근차근 진행될 것이고, 여섯 등급의 장애등급제 자체는 곧 사라질 예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존 장애등급제
아래에서 눌려온 장애인의 삶을 끌어올리진 못할 것이다. 진정 장애등급제를 대체해 장애인 권리 보장을 끌어낼 제도를 만들어낼지는, 내년에도 이어질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운동 등 장애인계의 활동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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