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선생’에서 ‘도우미견 박사’로
"허브, 불켜~ 옳지! 허브야 휠체어~ 옳지!"
지난 22일 오후 1시 20분,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내 훈련실에서는 훈련사와 허브(6살)의 훈련이 한창이다. 이번 훈련은 훈련사가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하지)으로 가정하면, 허브가 집안에서 지체장애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기본 훈련이다. 허브는 훈련사가 침대에서 손쉽게 일어날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함은 물론, 훈련사 지시에 따라 창문도 열고 불도 직접 켠다. 또한 리모콘이나 양말을 갖다주고 냉장고 문도 열어 물을 꺼내주기도 한다. 힘이 센 허브는 휠체어에 달린 줄을 물어 훈련사가 탈 수 있도록 앞에 떡하니 놓는다.
![]() |
![]() |
열심히 훈련하는 허브와 달리 버팀이(13살)는 바닥에 엎드려 물끄러미 허브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한눈에 봐도 폭삭 늙은 버팀이는 사람 나이로 치면 아흔살, 2명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으로 8년을 활동한 은퇴견이다. 이형구씨는 "장애인을 위해 수고한 버팀이는 이제 자기 멋대로 살고 있다. 버팀이는 프리(free·자유)"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이하 협회)는 훈련견과 은퇴견이 함께하는 도우미견 집합소다. 허브처럼 협회에서 훈련받고 있는 개는 현재 총 6~70여마리, 허브처럼 은퇴한 개는 총 47마리다. 협회는 도우미견 보급을 위한 종모견 관리에서 훈련은 물론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맡고 있는 국내 유일 비영리민간단체다.
협회는 시각·청각·지체장애도우미견 등을 분양하기 위해 각 장애유형과 용도에 맞는 '맞춤형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7~12개월)은 시각장애인 길안내를 위한 보행상 장애물피하기, 교차로·건널목 안내하기 등이며 청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4~6개월)은 청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전화, 초인종, 물주전자 등의 소리 알리기 등으로 진행된다. 지체장애인도우미견 훈련(6~8개월)은 물건 갖다주기, 심부름하기 등이다.
이렇게 훈련된 개들은 도움을 필요로하는 장애인들에게 '영구무상임대방식'으로 분양된다. 무료분양 조건은 단 하나, 도우미견을 잘 활용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이다. 이씨는 "도우미견 분양기간은 상관없지만,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다른 필요한 장애인에게 분양해 준다. 장애인들이 도우미견을 가족으로 생각하며 잘 활용해, 보다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 |
![]() |
이씨는 1973년부터 일명 '개선생'이었다.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학업과 돈을 모두 잡겠다'며 낮엔 일반개훈련소에서 개 훈련을, 밤엔 공부를 했다. 동물을 좋아했던지라 적성에 꼭 맞았다.
그러던 중 스승이 보여준 개훈련을 다룬 일본책에서 '맹도견의 자격과 훈련'이란 내용이 눈에 번쩍했다. 열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도견 내용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이거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갖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특별한 계기도 뭣도 없이 당시 그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고, 그게 운명이라 생각했다.
이 씨는 1992년 직접 운영하던 일반개훈련소가 어느 정도 안정돼가자,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국내에는 도우미견에 대한 정보도, 훈련소도 없는 상황. 영어는 젬병인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일념으로 외국 서적이나 자료를 구해 도우미견에 대해 밤낮으로 공부했다. 훈련소 일부에 길을 만들고 장애물을 주워와 설치하는 등 간이 도우미견 훈련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당시 첫 훈련견인 '칼'을 데리고 일본을 방문, 도우미견훈련소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일본훈련소나 내가 혼자 하는 훈련이나 큰 차이가 없음을 느끼자 도우미견 훈련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감을 밑천삼아 도우미견 훈련에 박차를 가했고, 한국 실정에 맞는 도우미견 양성에 올인했다. 사람들에겐 생소한 개를 데리고 버스를 탔고 거리를 나섰다. 지저분했던 한국 길거리에 적응시키기 위해 '떨어진 걸 주워먹지 않는 훈련'도 하느라 애먹기도 했다. '더러운 개를 데리고 어딜 나서느냐'는 소릴 들을때면 개줄을 손에 꽉 쥔 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 |
![]() |
대기업에 관심묻혀도 꿋꿋히 훈련·· 지체도우미견 유일훈련기관
이듬해 시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을 시작한다는 곳이 나타났다. 바로 대기업 삼성이었다. 삼성은 전세계 도우미견 훈련기관 중 유일한 기업이다. 기업 홍보를 위해 시각장애인도우미견을 이용하기로 한 삼성은 도우미견 훈련에 선례가 있던 외국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도우미견을 양성해갔다. 지원없이 순수 자비로 훈련하는 이씨와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삼성의 광고에 이씨의 노력은 빛을 받지 못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도우미견은 삼성뿐'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으론 화도 났죠. 하지만 어차피 기업의 목적과 제 목적은 달랐고,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눈을 뜨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1997년 '시각장애인만 도우미견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발견과 함께 일본에서 '청도견'이라고 불리던 청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이 자리를 잡을쯤 되자, 2003년 삼성도 청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에 들어갔다. 기업이 모두 독점하겠다는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2000년부터는 지체장애인도우미견 훈련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산업재해나 교통사고로 인해 지체장애인 수가 늘어난다"는 게 훈련 이유였다.
이씨는 "지체장애인도우미견은 아직까지 삼성이 하지 않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체장애인도우미견은 집안 내부에서 장애인을 돕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길을 안내하는 시각장애인도우미견보단 홍보효과가 떨어졌다. 홍보를 통한 이미지개선을 추구하는 기업 생리에선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이는 청각장애인도우미견도 빗겨나지 못했다.
삼성은 올해부터 청각장애인도우미견 훈련·보급을 제외시켰고, 시각장애인도우미견만 훈련하고 있다. "예상했던 결과"라는 이씨는 아직까지도 시각·청각·지체장애인도우미견 모두를 훈련하고 있다.
털 안빠지는 도우미견 만들고, 용어도 직접 만들어
이씨의 도우미견 사랑은 끝이 없다. '장애인도우미견'이라는 용어도 이씨의 작품이다. 안내견이란 용어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쓰이는 용어라, 모든 장애인을 허용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했다. "일본말을 그대로 쓰는 건 싫었고 외국어를 굳이 어렵게 쓰지 말잔 생각에 '도우미개'를 생각해냈죠. 근데 '개'라는 말은 방송용어로 적절하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자로 개 '견'을 써서 '도우미개'나 '도우미견'이라고 부른답니다."
이씨는 우리나라 정서와 환경에 맞는 도우미견을 양성하는데 가장 주력했다.
시각장애인도우미견으로는 순하고 영리한 리트리버 종이 많이 활용되는데, 털이 많이 빠져 좌식문화인 우리나라에서 활용하기엔 어려움이 컸다. 이에 이씨는 털이 적게 빠지는 푸들과 리트리버를 교잡시켜 '털이 안빠지는 영리한 개'를 만들어 도우미견으로 훈련시킨다. 자체적으로 모견과 수컷을 데리고 있으며, 그 중에서 자질이 우수한 개를 도우미견으로 선별한다.
이씨는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과 조건에 충족할 수 있는 도우미견을 선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신체장애인도우미견 뿐만 아니라 정신장애인이나 노인 등을 위한 치료도우미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개나 말 등의 동물을 통한 심리치료를 위해 한국동물매개치료복지협회를 만들어 치료와 치료사 양성교육 등을 진행 중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