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28일 늦은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비마이너 창간 3주년 기념 연속 강좌 중 첫 번째 시간으로
수유너머N 이진경 연구원의 ‘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론’ 강의가
열렸다. |
눈앞의 존재자
물을 마신다. 이 물은 어디서 온 것인가. 또한 이 물을 담고 있는 이 페트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지하에서 이 물을 긷기 위해 누군가는 땅을 파야 했을 것이고 물을 길은 후 공장으로 옮겨 페트병 하나하나에 물을 담았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 각 지역으로 배송됐을 것이다.
이 물을 담은 페트병은 또 어떠한가. 페트병을 만들기 위해 공장을 짓고 수많은 원료와 석유를 채취하여 그렇게 하나의 페트병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전에 물 그 자체, 이것은 어디서 왔나.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지하 깊숙한 곳까지 흘러들어온 지하수,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 이것들을 가능케 하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 어떠한 힘의 작용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페트병에 하나의 물이 담긴다. 그 물을 사람들이 마신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이 모든 과정과 그 속에 담겨 있는 타자의 도움을.
페트병에 담긴 물 한 점, 이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온 우주, 이 세계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의 존재자(페트병에 담긴 물)에 얽힌 무수한 연쇄작용을 잘라내고 눈앞의 ‘페트병에 담긴 물’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한낱 그냥 ‘물’이 된다. 페트병에 담긴 물 한 통은 그에 적절히 맞춰진 화폐 가치와 교환되는 것이다. 화폐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과정과 역사와 이야기와 타자의 도움을 무화(無化)시킨다.
‘폐’를 지우는 것
지난 2월 28일 늦은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는 비마이너 창간 3주년 기념 연속 강좌 중 첫 번째 시간으로 수유너머N 이진경 연구원의 ‘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론’ 강의가 열렸다.
이 연구원은 강의 서두에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이 세상에 폐 안 끼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이 연구원의 말을 따르자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이 폐를 끼치고 산다.” 그가 오늘 사 먹은 삼각김밥도 누군가 농사짓고 김을 건져 말려서 가능한 것이며, 수유너머 사무실에서 대학로 노들야학 강의실에 오기 위해서도 그곳까지 태워다준 버스 기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내가 지금-여기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식물 역시 마찬가지다. 농부가 심은 벼 한 포기 또한 자라나기 위해서는 땅속 미생물에 폐를 끼친다.
이 연구원은 “정도나 양상, 방법만 다를 뿐”이라며 “폐를 끼치지 않고서는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 “세상 모든 존재자는 존재론적으로 장애자다.”
장애, 이 말만큼 존재의 불완전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말은 없다. 여기서 ‘장애자’라는 개념은 기존 장애인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닌 모든 존재의 불완전성을 지칭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포함하기에 인(人)이 아닌 자(者)를 사용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폐를 끼친다고 유난히 손가락질 받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이 연구원은 자신의 경험을 빌려 이를 설명한다.
“예전에 학교에 강의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데 지갑을 두고 온 거예요.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10분 정도 걸리는데 집에 다녀오면 지각하니깐, 버스 기사님께 ‘지갑을 안 가져왔는데 태워줄 수 있나요’ 사정해서 다행히 돈 안 내고 탔습니다. 그렇게 버스에 타고나니 기사님께 고마운 마음도 생기고 그분께 내가 폐를 끼쳤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내가 버스를 처음 탄 것도 아닌데 이 생각을 왜 이제야 할까. 똑같은 상황인데 왜 그전에는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둘의 차이는 그전엔 돈을 내고 지금은 돈을 내지 않았다는 거죠.”
어떠한 것에 돈을 내는 행위, 그 순간 그것은 화폐 가치로 교환된다. 버스를 타는 것, 누군가 해준 밥을 식당에서 먹는 것 등 어떠한 것에 대해 돈을 지급하는 순간 그 행위에는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내는 사람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지 않고 ‘교환’했다고 생각한다. ‘돈을 쉽게 내는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신세를 끼치고 있음을 쉽게 잊는다. 그러나 돈을 지급했다고 하여 내가 지금-여기 존재하기 위해 폐를 끼쳤다는 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러한 교환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대된다.
이 연구원은 자본가 역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한다는 사실 때문에 폐 끼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신이 지급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키는데도 말이다. 또한 임금 체납이 되어도 자본가는 자신이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 연구원은 “미래의 지급가능성이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가를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지급하리라고 가정된 돈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는 자, 자본가라는 타인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자임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동자 역시 장애자이나 자본가와 달리 “타인들의 존재에 대한 민감성, 자신을 떠받치는 타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폐를 끼친다는 것을 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끝없이 의식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 연구원은 “자신이 폐를 끼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사람들은 존재를 망각할 여지가 없다”라며 “존재한다는 것은 심오한 사건이며 이를 통해 우주 전체가 나를 떠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폐를 끼친다는 것, 이를 통해 우리는 존재에 대해, 즉 내가 지금-여기-있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으며 존재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보게 된다. 존재란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존재를 본다는 것은 폐를 끼치는 자에서 눈을 돌려 그들이 폐를 끼치는 자들을 보는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폐를 끼치게 해주는 자들의 거대한 연쇄가 폐를 끼치는 자에게 주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전했다.
오늘 나의 살아 있음이 어느 누구에게 빚진 것인지 돌아본다. 그로써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누군가는 ‘우주 전체’다. 그러나 나 역시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타자’이기에 타자의 존재에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폐를 끼침과 동시에 서로의 존재에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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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과 장애자
“존재한다는 것은 심오한 사건”이라고 이 연구원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우아하고 형이상학적 설명에도 정작 현실에서 폐를 끼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야기하는 일이다. 따라서 환영받기는커녕 욕을 먹는다. 폐를 끼치는 자들, 장애자들.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나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그렇지 않다. 모두 다 함께 폐를 끼치고 사는데도 유독 눈에 띄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왜 이리도 눈에 띄는가. 이들은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규정된 채 이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이 세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문턱에 의해 누구는 ‘장애인’이고 누구는 ‘정상인’으로 구별된다.
이른바 ‘정상인’들의 눈에는 장애자들이 툭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눈엣가시다. 그들은 불편을 야기한다. 휠체어를 탄 채 버스를 타겠다고 하여 버스를 지연시키고 집회로 차로를 점거해 대중교통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그들은 툭 튀어나온 돌부리가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문턱에 걸려 그 문턱을 넘지 못한 자들이다. 혹은 벼랑 끝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장애는 바로 이 ‘문턱’에 의해 정의된다. 쉽게 넘을 수 없는 문턱, 바로 그 환경에 의해 장애자는 정의된다.
“안경이 없으면 전 1m 앞에 있는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보고 장애인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생물학적 능력으로 굉장히 중요한 기능이지만 안경이라는 값싼 수단으로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 그 문턱이 높다면, 안경이라는 수단이 없거나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면 전 장애자로 ‘판정’되었을 겁니다.”
이어 이 연구원은 사회에 따라 장애가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설명한다.
“보르네오 푸난바 족은 맹인과 쌍둥이를 장애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신 중 성관계를 해 성기가 눈을 찌르거나 한 사람을 둘로 나눴다고 생각한 거죠. 부모가 임신 중 성교를 자제하지 못한 결과라 해서 도덕적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쌍둥이를 장애인,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유럽에서도 있었죠. 불온하다고 해서.
어딜 가나 장애인을 정의하는 게 다르다는 것은 한편, ‘결국 장애인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 사회 문턱이 장애인을 정의하는 거죠.”
문턱을 넘기 위해 문명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수많은 과학기술이 발전했고 지금도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이 발전할수록 장애인의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문턱을 넘기 위한 기술로 문명이 발전했지만 ‘그럼에도’ 그 문턱을 넘지 못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낙인이 되었다. ‘사회와 과학이 이만큼 발전해도’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된 것이다.
“황우석이 강원래 앞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통해 당신을 일으켜 세우겠다’ 했어요. 쇼였지만. 그런데 만약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해보죠. 현재 에이즈 약 먹는데 1년에 2천만 원 든다고 해요. 그런데 줄기세포 치료는 얼마나 비싸겠어요?
전에는 그것을 피할 수 없는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내 삶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젠 ‘남들은 치료하는데 난 가난해서 못하네’ 하면서 치료가 삶의 목적이 되는 거죠. 치료비를 버는 게 삶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만약 암 치료하는데 인생을 건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사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내 삶이 이제 얼마 남았으니 내 신체, 내 병조차도 인정하고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게 좋을까요.”
이 연구원은 “문명화가 될수록 그 안에서 장애인의 문턱은 더 높아지고 장애인은 불편한 존재로 간주했다”라면서 “장애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 거꾸로 장애의 체계가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는 시스템 자체가 빈곤을 착취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인위적 장애자’로 만들면서 성장의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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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문턱을 제거하려는 집합적 운동
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전,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는 산에서 베면 됐다. 길을 가다 배가 고프면 나무나 밭에 열린 열매를 따 먹고 필요한 것은 공동체 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산에서 나무를 베면 ‘훔친’ 것이 된다. 설령 공유지여도 함부로 나무를 벨 수 없다.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생겼다. 사람들은 손에서 쟁기를 놓고 공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장에서 일한 대가로 임금을 받았고 그 임금으로 시장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 외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연구원은 “자본주의는 거대한 거지의 세계로 시작됐다”라며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프랑스에서는 부랑자들을 수용소에 가뒀습니다. 파리 시민 백 명당 한 명꼴로. 부랑 금지법이 생긴 거죠. 이 수용소를 한국말로 옮기면 종합병원이 됩니다. 즉, 종합병원은 수용소에서 탄생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먹고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멀쩡한 팔과 눈을 떼어버리고 외팔이, 외눈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죠. 인위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시작의 비밀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동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싫은 일이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취직해야 하고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이 연구원은 자본주의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는 오늘날 장애자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계급은 계층과 달리 변하지 않는다. 마치 유리 천장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더는 상승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유산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계급 안에 또 하나의 문턱이 생겼다. 그 계급의 문턱은 오늘날 노동자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의 문턱으로 변주되어 나타났다.
2011년, 현대차 노조는 정년퇴직자와 25년 이상 장기근속자 자녀의 신규인력 채용 우대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른바 ‘정규직 세습’이다. 정규직인 자신이 퇴직할 때 자신의 자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단체협약 교섭에 사인한 것이다.
“한 번 비정규직이 된 사람이 후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20%도 안 됩니다. 이는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그 중 80%는 계속 비정규직이 된다는 겁니다. 재작년, 현대차는 정규직 직원이 퇴직하면 그 직원의 자식이 정규직으로 들어가는 것을 단체교섭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북한 가지고 조롱하는데 삼성은 현재 3대째 세습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죠. 이젠 정치도 세습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자본가, 부르주아, 재벌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자기 정규직을 세습하려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정규직 자식들은 다 비정규직 하라는 거죠.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에 문턱을 노동자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역시 대공장 중심의 정규직 조합원으로 이뤄져 있다. 그 안에서 비정규직은 사회적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 장애자다. 이 문턱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철탑에 오르고 크레인에 오르지만 쉽지 않다. 문턱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한 역사에서 인종차별의 문턱, 성차별의 문턱이 그러했듯.
두 개의 힘이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한다. 문턱을 만들고 유지하려는 이와 그 문턱을 깨려는 이. 이 연구원은 이러한 관계를 ‘적대’라고 지칭하며 이는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두 집단의 대칭적 대립이 아니라, 문턱을 설치하고 유지함으로써 흐름과 이동을 저지하려는 자와 문턱을 제거함으로써 흐름과 이동을 자유롭게 하려는 자의 대립”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문턱에 의해 자신이 소유한 영토를 고수하려는 자와 문턱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영토를 개방하려는 자의 대결”이기에 “혁명은 근본적으로 탈영화운동”이자 “문턱을 제거하려는 집합적 운동”이다.
![]() ▲수화통역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 |
장애의 정치학
문턱을 넘지 못한 자들은 그 문턱에 의해 가려지고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이 수용소에 갇히듯 그들은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치워’진다. 이 연구원은 “폐(를 끼치다)의 소멸이 화폐 때문이었다면 장애자의 소멸은 권력 때문”이라고 전한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 등록 비율은 5% 정도라고 합니다. 미국은 20% 정도 됩니다. 2011년 발표된 WHO 통계를 보면 전 세계인구 중 장애인 수는 10억 명으로 전 인구의 15%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는 장애인의 개념이나 집계방법 등의 차이에 따라 장애인 수나 비율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여줍니다.”
WHO 통계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등록 장애인 수는 턱없이 낮다. 한국에서 장애인임을 드러내는 것은 ‘낙인’이다. 사람들을 불편케 하는 그들은 사람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사라진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따지자면 열 명 중 한 사람은 장애인이어야 하고, 버스에 탄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장애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그들을 만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낯선 일이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사고로 촉발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서 장애인들은 버스에 ‘직접’ 타고, 지하철에 ‘직접’ 탐으로써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하철을 탈 수 없었던, 계단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었던 이들에게 그들의 싸움 방식이란 금지되었던 그 문턱을 넘는 집단적 행위 그 자체였다.
이른바 ‘정상인’들에게는 일상적 행위였던 그것이 장애인들에게는 투쟁이었고,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행위였으며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이 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마저 인정치 않았던 ‘이동권’이라는 권리를 투쟁으로써 만들어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동권이란 단어는 2003년 국립국어원에 ‘신어’로 등록된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저상버스가 전국 각지에 도입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정치란 몫 없는 자들이 몫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 말할 자격 없는 사람이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만금 공사 때, 4대강에 시멘트를 바를 때, 그 때문에 죽어간 생명체가 보였다면 절대 그렇게 못 할 겁니다. 그
안에서 죽어가는 것들이 보였다면. 보이지 않기에 생명의 숫자로 세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세어지지 않기에 몫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죠.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시설 자립생활 또한 정치적 행위다. 시설에
‘치워’져 있던 사람들이 시설에서 나와 거리를 누비며 버스를 타고 지역생활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은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알지 못했던 불편함을 겪게 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그들을 기다려야 한다. ‘정상인’들에게는 장애인들의 속도가 도저히
익숙지가 않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불편함입니다. 누가 그 권리를 부정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다녀야 합니다.
자신들이 불편하지 않고서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불편함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속도를 존중하고 그 속도가 불편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문명을 창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편함이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연구원은 “계속해서 사회의 불편함을 야기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 되듯 이 사회 역시 불편한 곳이 중심이 되어 그곳으로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고, 마침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상인’들에게는 문턱이 아니었던 문턱들. 그러나 그것을 문턱으로 인식하는 10% 사람들이 나타나 이것이 불편하다 외친다. 불편을 야기한다. 정상인들 또한 그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면, 그것은 마침내 제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이 연구원은 '장애의 정치학'이라고 소개했다.
“장애인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정상인’들과 같이 보이고, 이동의 지점에서 섞여 있고. 수많은 장애인이 스스로 내면화해서 도망가는데 그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좋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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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난 뒤 참여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은 이 연구원의 ‘혁명’에 관한
해석에 대해 “혁명이라 이야기하기에는 자기 만족적 해석에 그치는 것 아닌가”라고 물음을 제기했다.
이 연구원은 “전에는 혁명이란 모든 걸 다 바꾸는 것이고, 점진적인 것은 계량주의라 생각했다”라며 “그런데 요즘은 그러한 혁명이란 안이한 한탕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이 연구원은 “이는 마치 40년 동안 찌든 몸의 병을 수술 한 번으로 고쳐 깨끗한 몸이 될 거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라면서 “40년 동안 병들어 있었으면 치료하는 데 20년은 걸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이 연구원에게 있어 혁명이란 권력을 잡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연구원은 “권력과 대결하는 모든 지점에서 그것과 다른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혁명”이라면서 “혁명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야 한다. 계급의 문턱을 깨나가는 것은 계급혁명, 성의 문턱을 깨나가는 것은 성의 혁명이다. 혁명은 확장되어야 한다.”라고 전했다.
한편, 이날 강의는 두 시간 반가량 진행되었으며 50여 명이 참여했다. 비마이너 창간 3주년 연속강좌 두 번째인 이진경 연구원의 ‘노동의 인간학을 넘어서’는 오는 13일 늦은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진행된다.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