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흉내 내며 자기소개를 한다는 이른바 ‘JM’으로 하루가 시끄러웠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JM을 문화라고 주장한 한 대학 학부생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 분노는 대개 해당 학생들의 ‘부끄러운 성품’을 향해 있었다. 대학이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며 그 대학 전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맞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은 인성교육을 하지 않으며 대학입학 때에도 인성 따위는 사실상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일까?
일반적으로 장애에 대한 몰지각한 인식이 드러나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것을 ‘인간성’의 결여, 혹은 성품의 미발달로 묘사한다. JM 사건의 대학생들도 그들이 인간에 대한 존중감이 떨어지고 소수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간들’ 혹은 ‘개념 없는 인간들’ (여기서 또 장애를 여전히 부정적이고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만들면서 스스로는 성숙한 척 하는 그 지겨운 레토릭(수사법)이 반복된다. “너희는 머리에 장애가 있구나!!”)이라며 비판받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판을 볼 때마다 나는 지나친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를 만난다. 스스로 장애가 없고, 장애인을 친구나 가족으로 둔 적도 없는 인간이, TV에서조차 콧대가 좀 낮고 체중이 평균이상인 사람들을 대놓고 희롱하는 사회에서 과연 장애인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뇌병변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팔다리가 뒤틀리고, 골형성부전증인 나 같은 인간들은 볼품없는 척추를 가지고 있다. 휘어지고 뒤틀린 몸을 추하고 멸시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사회의 본성이며 (감히 말하건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요컨대 장애를 비하하는 행위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소수의 고매한 인간들을 제외하면 장애인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자신의 친구로 두지 않은 인간은 장애인을 멸시하게 되어 있다. 인간성이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를 충격(?)하기
그렇다면 장애인 비하가 정당화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행위를 대놓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성품’이 아니라 ‘교양’, 즉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행해져야 한다. 미국의 백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데 극도로 신중하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예를 들어 '노원 병신' 같은 표현을 진보적 정치인들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자신이 품위 있고 교양있는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흑인이 열등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절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그 사회가 합의한 규범이고 예의이며 교양인 것이다.
인간의 성품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고 자신과 가까운 인간들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에게 모욕적일 수 있는 언사를 피하려는 노력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끌어내는 그런 아름다운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를 멸시하고 깔아뭉개 자신을 빛내고 싶은 욕망으로 들끓는 존재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 비하를 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따듯한 심장을 갖지 못했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무지한 두뇌를 가졌다고 비판해야 한다. “네가 비록 마음속으로는 나를 추하다고 깔보고 싶겠지만,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기억하라!”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심는 것이다.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을 일삼고 다니는 한 인간의 인간성이 겉으로 진보적이고 고매한 척하는 인간보다 더 숭고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이라면 왜 특정한 ‘문화’가 장애를 비하하는 것이며 그것이 장애를 가지고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인지 가르치면 된다. 그는 훌륭한 성품과 그에 맞는 뇌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대부분의 인간처럼, 자신과 관련 없는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비하로 얼룩진 인간이라면, 그 경우도 역시 왜 그와 같은 비하적 표현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지를 가르치면 된다. 자신의 품위와 교양이 격하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규범을 재빨리 습득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성품, 인간성, 그 심장에 호소하는 일보다 나은 전략이다.
몸 전체를 펼쳐놓기
위와 같이 ‘머리’를 충격하는 방법은 결국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은 변화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전략에 불과할까? 추한 욕망을 더 높은 차원의 규범을 수용하는 이성적 힘으로 통제하는 것이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를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규범과 예의와 교양으로 강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 전체를 펼쳐놓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몸 전체를 펼쳐놓기’ 전략은 장애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그 '추한 몸'을 그들의 눈앞에 드러내고 우리가 가진 욕망과 아름다움과 다양성과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방법론의 하나로 ‘연극’을 이야기해왔다. 추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몸이 마음속 깊이 구멍을 내는 파격적인 모습을 눈앞에 펼쳐놓는 전략의 하나로서의 연극말이다.
물론 연극은 우리가 말하는 대학로 소극장의 연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 장애인 당사자, 혹은 그의 가족, 혹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연인으로, 친구로, 제자로, 선생님으로, 작가로, 노동자로 둔 양식 있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사회적 전략으로서의 연극도 있다. 그래서 나는 장애를 가진 채 연인과의 로맨스를 펼쳐놓고, 장애를 가진 내 다리를 펼쳐놓고, 내 분노를, 욕망을, 진심을 나의 동료들과 함께 ‘각색하여’ 펼친다. 비마이너 역시 그러한 무대의 하나다. 많은 장애인이 분노를 담아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던 그곳도 바로 무대다.
이것은 이른바 “병신 육갑한다”라던 오래된 명제의 실천이다. 타자의 인간성과 머리에 호소하기보다, 우리의 온몸을 펼쳐 이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것. 그것은 심장보다 깊은 곳에 각인되리라 생각된다. JM을 문화라 여기던 대학의 학생들은 아직 이 무대의 관객이 되어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 크고 매력적이고 충격적인 무대를 구상해본다.
김원영. 서른 살이 넘었다. 장애, 연극, 법에 관심을 두고 산다. 골형성부전증으로 15년간 집에서만 살았으나 한국사회에서 태어난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 가방끈이 길다. 친절하지 않은 편이나 친밀한 친구들은 몇 있다.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를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