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마무리될 즈음에 한빛이와의 여행을 계획한다. 여름 내내 힘들게 지내는 통에 눈치만 보며 시기를 맞추느라 좀 늦어졌다. 이미 한 번 외할머니와 여행을 다녀왔으나 제대로 된 여행기분을 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다녀왔었다. 당시 여행지에 도착하고서 조금 지나 쓰러지기 시작하는데 영 맥을 못 추고 생기를 찾지 못했었다. 지내는 것이 그렇게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힘이 없다 보니 다른 가족들도 기분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돌아왔는데 컨디션을 잘 봐가며 일정을 잡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경기(驚氣) 양상이 좀 변해 한 번 하고 나면 회복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이 돌아와도 활기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놀러 가는 것이 늘 마음만 있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개학하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 일정이 잡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다녀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 ▲한빛이와
여름여행. |
여행 전날 하늘은 시커멓게 내려앉아 비를 쏟아 붓는다. 이런 날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하늘이 어깃장을 놓는 것처럼 여겨져 야속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정해진 것은 한다는 조금은 ‘무대포’적인 생각으로, 떠나는 날 아침 시커먼 구름이 머리 위에 앉아 있는데도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8월의 셋째 주에 잡은 날이라서 그리 번잡하거나 혼잡스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출발을 한다. 가는 내내 비는 오락가락하면서 모처럼의 여행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렇게 도착을 한 강원도 고성의 작은 해변(공형진해수욕장 : 실명은 공현진이었다). 비는 세차게 뿌리고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점심은 그 집에서 해결한다. ‘수정반점’이라는 허름한 식당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세찬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소문이 헛된 것은 아니란 생각에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려 식탁에 놓인 높은 ‘짬뽕’, ‘짜장면’은 푸짐하기도 하고 맛도 제법이다. 거기에 주인장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든다. 마치 먹으려면 아무 소리 말고 기다리란 듯 아무 대거리 없이 주문만 받고는 일체의 다른 말이나 행동이 없다. 그렇게 ‘맛집’ 순례를 마치고 숙소로 잡아 놓은 곳에 도착하니 입실 시간이 안 돼 또 한 시간을 허비해야 할 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느지막이 들어가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우선 먹고 보자는 식으로 짐을 다시 챙기고 빗속으로 나선다.
동해의 장점은 항이 많다는 것이다. 차를 돌려 들어가면 해변과 작은 항구들이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의 해변으로 가서 조개구이와 마주한다. 낮이라지만 그래도 술이 한 잔 빠지면 섭섭하니 반주(?)도 곁들인다. 막 상이 차려지고 맛나게 익어가는 조개들을 정신없이 집어 먹는다. 한빛이는 제비새끼마냥 입을 벌리고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한참을 그렇게 먹고서 배가 부른 녀석은 다시 경기를 하면서 쓰러진다.
녀석을 차 안에 들여다 놓고 망을 봐 가면서 함께 간 친구들과 한 잔, 두 잔 술이 돌고 바닷소리, 바람 소리, 두서없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다. 어스름 저녁 시간이 되어 다시 숙소를 찾아 들어간다. 짐을 정리하고 한빛이 저녁을 다시 준비한다.
이번 여행은 날씨의 비협조로 놀기보다는 먹고 즐기고 이야기하며 마음과 눈과 입이 즐거운 여행으로 주제를 잡았다. 그러니 입은 쉬지 않고 먹을 것을 찾는다. 한빛이를 먼저 먹이고 씻기고서 잠시 놀아주는 척(?)하다가 잠을 재운다. 늘 자던 시간에 잠을 청하니 내려오느라 피곤했던지 바로 잠이 들었다.
남아 있는 어른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고, 술잔이 돌고, 안주로 사온 생선회는 아침에 한빛이 먹을 양을 채소로 잘 싸 놓고 맛나게 먹는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꽃은 새벽까지 이어진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녀석의 일상은 여기서도 어김없다. 노래를 틀어 달라는 요구가 새벽부터 시작된다. 단단히 준비해온 컴퓨터(2대) 덕분에 녀석의 욕구와 요구는 항시 가능하다. 아침을 먹고, 나설 준비를 마치고는 다시 먹을 것을 찾아 길을 떠난다. ‘식도락’ 여행은 이 맛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고성에서 ‘물회’는 참맛이라는 말을 듣고 온 터인지라 물 좋은 항을 찾아간다.
그렇게 가다고 ‘송지호’라는 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라도 여유롭게 구경하고 가자는 생각도 있었고, 아무리 먹고 노는 여행이라도 눈이 즐겁고 마음도 여유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 크게 작용했다.
날은 거뭇거뭇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세차 파도는 높기만 하다. 몇몇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 노는 모습에 한빛이와 마님도 발만 담글 생각에 신발을 벗었는데 한빛이는 그럴 마음이 없었나 보다. 물에 들어가서 조금 있더니 자리 잡고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재미가 좋았던지 연신 웃음이 피어난다. 피곤하고, 기운 없어 하던 녀석이 이제는 물에서 나가지 않겠다며 손을 잡아끈다. 날은 어수선하지만 물은 그리 차지 않아 다행스럽기는 하다.
그렇게 잠시나마 놀러 온 기분을 내고 씻으려는데 샤워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화장실은 쇠사슬로 잠가 놓았다. 아무리 해수욕장이 장을 파할 무렵으로 사람의 발길이 뜸해졌다고는 해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지를 찾는 사람의 마음으로 운영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벌건 대낮에 개방된 수돗가에서 아이를 씻겨야 했다. 아무리 장애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름 자존심이란 것이 있는데 그렇게 벌거벗겨 놓고 광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조금만 세심하게 배려한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대충 마무리하고서 점심으로 정한 ‘물회’를 먹으러 간다. 항에 도착하니 온통 비슷한 메뉴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어느 집으로 갈 것인지 조금은 난감하기도 하다. 어느 손을 잡으면 좋을지 몰라 한빛이에게 선택권을 준다.
‘한빛 몇 번 집으로 갈까?’하고 물으니 손가락을 펼쳐 길을 안내해 준다. 서로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손길을 뿌리치고 한빛이가 정해준 숫자의 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니 서비스로 국수도 더 주고, 양도 푸짐한 게 마음에 든다. 여행의 대미를 기분 좋게 해 주니 서울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해수욕장에서 상한 마음을 다 씻어주니 더 좋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기운 없던 녀석도 환한 웃음으로 지낼 수 있어 좋았다. 올해 들어서 가장 환하고, 밝은 웃음을 만들어 내며 지내준 녀석, 어떤 음식도 마다치 않고 잘 먹어준 녀석, 긴 이동시간에 짜증 내지 않고 함께 호흡해 준 녀석,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말도 잘 들어주었던 녀석에게 고맙고, 1박 2일을 함께 해 준 두 친구에게도 고맙기만 하다. 이야기 상대가 돼 주고, 한빛이 놀이 상대가 돼 주고, 술친구가 돼 주고, 자칫 심심할 수 있었던 여행에 양념역할을 톡톡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 덕분에 여행이 재미가 두 배가 됐다.
그렇게 먹고, 놀며 지낸 시간이 훌쩍 가고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바람 좋고, 사람 좋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을 떠나 다시 습하고 후텁지근한 서울에 들어왔다. 수술을 앞둔 한빛이의 이번 여름여행은 그동안의 여행 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