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복지
2013.04.30 13:07

철길 위를 달리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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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1 17:00 입력

 서울시시설장애인자립생활지원네트워크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던 장애인이 탈시설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도록 지원하는 주거복지사업을 지난 2010년부터 3년 동안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2일 이번 사업을 마무리하는 보고대회를 열고 이날 총 16명의 자립생활 과정을 생생히 담은 인터뷰집 '나 자립했다'를 발간했다. 이번 책에 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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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위를 달리는 자유 이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_ 편집자 주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제부도에 가긴 했는데, 대부분은 지하철을 타고 다녀. 언제든 전동휠체어도 충전할 수 있고, 따로 표를 끊거나 돈을 내지 않아도 멀리 갈 수 있잖아. 그렇게 멀리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져.”


가족은 야속함이었다


구례의 깊은 산골. 이곳에 집이 있었다. 기억의 무게는 이 집에 머물렀던 6년의 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일곱 살이 되던 이듬해에 그 집에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너무 어릴 적이어서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선명한 것은 존재, 낡고 허름한 집, 밖에서는 목사였지만 내게는 아무런 울타리도 되어주진 못한 힘없고 초라해 보였던 아빠, 얼음보다 차가웠던 엄마, 이목구비 어디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네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는데, 찬 서리 같은 엄마의 눈빛과 목소리를 기억한다. 미움을 받았던 기억만큼은 왜 이리 선명하게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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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시설에 들어가 스물세 해를 보내고 다시 지역사회로 나온 신진수 씨. ⓒ고은경


구례의 여섯 살 꼬마, 그때 나는 작은 몸에 어울리는 조그마한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갔던 기억보다는, 방안에서의 기억이 많다. 엄마는 “밖에 나가서 못된 짓을 한다”며 방안에 나를 가둬놓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문을 열어달라고 아무리 애원하고 떼를 써도 한 번 잠긴 문은 벽이 되어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집이 지겨웠고, 엄마가 미웠다.


1989년, 추위가 물러가고 볕이 따뜻했던 봄. 엄마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으로 고아원 간판 앞에 나를 세웠다. 집 밖에 나가기도 어려웠던 첫 서울구경이었다. 태어나서 이제껏 그렇게 버스를 오래 타본 적이 없다. 구례에서부터 버스를 갈아 갈아 탔고, 바깥 풍경에 한껏 신이 나 있던 참이었다. 고아원 간판 앞에서 “이곳에는 살기 싫다”고 울고 불며 매달렸지만, “다음에 또 보러 오마”라면서 엄마는 기어코 나를 떼어 놓았다. 서운한 기색도 없었다. 아빠와 동생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는데, 신 나기만 했던 서울구경이 서러운 서울살이의 시작이 되어버린 날이었다.


혼자 남겨졌고, 어쩔 수 없이 낯선 손에 이끌려 따라 들어간 방은 무서웠다. 갓난아이들부터 나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큰 사람들로 가득한 방. 날마다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떼를 썼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같았다. 전화를 걸어줄 수도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수도 없다고 했다.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 시설에서 나를 돌봐주던 선생님들에게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고아원에 들어온 해 가을 막냇동생이 태어난 이야기, 이듬해 여름 아빠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 이것으로 나와 가족들에 대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일곱 살 봄, 그때의 야속함은 스물다섯 번의 봄을 보낸 지금도 여전하다.


23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다


시설에서 스물세 해를 보냈다. 시설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갈 데도 없었고, 고아원 간판은 장애인 시설로 바뀌었다. 시설에서의 삶. 무엇 무엇은 하지 말고, 무엇 무엇은 하라는 지시들의 연속이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배우라는 건 다 배웠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다.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재활치료와 언어치료, 미술과 음악, 컴퓨터를 배웠다. 하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딱히 재미있는 게 없었다.


더 이상은 시설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됐을 때가 있다. 스물의 중반이 조금 넘었을 때다. 어떤 직원에게 시설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죽을 때까지'였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직원의 대답은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했다. 하라는 것 외에는 해본 게 없다. 어린아이와 같이 늘 염려 속에 살았다. “혼자서는 위험해”, “나가면 위험하니까 나가지 마”, “혼자 나가면 다친다”.

 

일어나지도 않은 염려들을 뚫고 어쩌다가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담당직원에게 허락을 받고, 외출증을 쓰고, 결제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들이 진행됐다. 시설은 나를 포함한 시설의 장애인 전체를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하려 들었고, 장애인들에게 비롯된 어떤 문제도 원하지 않았다. 평생을 그 테두리 안에서 살다간, 영원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동안 시설에서 나올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시설에서 나가서 살 곳에 대한 조건과 기준은 간단했다. ‘하나, 무조건 규칙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규칙을 무너뜨리니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편안한 곳에서 살고 싶었고, 극장이나 여행이 다니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허락받지 않아도 되고, 가고 싶은 데에 가는 것.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고 싶었다. 

 

집요하게 장애인자립생활센터들을 찾아다녔고, 그러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준비하고 있는 주거복지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고아원부터 시작된 시설 생활 23년 만에 드디어 시설에서 나올 방법을 찾게 된 거다. 자립을 위한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위험하게 왜 나가려 하느냐는 원장님의 계속되는 염려를 뒤로하고,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짐을 쌌다. 2010년 10월 28일, 중랑구의 한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여기가 내 집이구나’ 이상하게 편안했고, 몸과 함께 빠져나온 짐들 역시 마치 거기가 본래 제 자리인양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시설에서 나와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주소를 옮기고, 생계비를 신청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들렀다. 잊었던 가족들의 존재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구례의 그 산속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야속함 뒤 그리움이 이끈 20년 만의 고향 집 방문이었다. 사람은 없었다. 찾을 길이 없어 다시 시설로 돌아왔고, 야속함 뒷자리로 가족들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잊었던 그 가족들이 가족관계증명서에 찍혀 나타난 것이다. 시설에서 나오려는 장애인 중 부모가 있는 이들은 모두가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 부모에게 일정 이상의 소득이 있다고 조사되면 생계비를 지원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연락이 끊겼다고 아무리 말해도 동사무소에서는 믿지 않았고, 이런 조사들이 나를 비켜가지는 않았다. 부모에 대한 소득조사가 진행됐고, 최근 경제적 지원이 없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통장사본과 통신사에서 통화기록을 떼어서 제출했다. 애초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만한 애정이 있었으면 고아원에 데리고 가지도, 연락도 끊어버릴 리 있었을까. 과정, 과정이 무척 잔인하게 지난 기억들을 후볐다.


그래도 미련, 그 되살아나는 야속함 뒤 다시 그리움이 피어났다. 혹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가물가물한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만나고 싶다고 아무도 모르게 연락을 넣었다. 지독히도 잔인한 사람들이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그래,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지.’


내 안의 벽, 아킬레스건


얼마의 잔인한 시간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루 스물네 시간이 두 곱절, 세 곱절이 되어 있었다. 하루를 채워 줄 무엇이 없어진 탓이다.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외출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자리에 들고. 지긋지긋하던 규칙, 되려 그것이 사라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시간 곁을 서성였다. 하루가 내 것이 되는 데 꼭 삼 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종종 신에게 묻곤 했다. 왜 꼭 장애인으로 태어나야 했는지, 왜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신은 구원의 대상이었지만, 나에겐 원망의 대상이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장애인이 아니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장애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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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수 씨. ⓒ고은경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다.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날 만큼 혹독한 언어치료를 받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게 싫어 언어치료를 받는 데 매달렸다. 정말이지 말이란 걸 잘하고 싶었다. 언젠가 연애하고싶은 사람이 있었다. 어쩌다 나와 얽히기는 했는데,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연애라는 것이 시작되기도 전에 연애할 뻔했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정리됐고, 그 뒤 연애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아지긴 했지만, 언어장애는 여전하다.

 

목발을 짚다가 전동휠체어를 사용하게 됐다.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어디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는 이동을 편하게 해줬지만, 두 다리가 아닌 네 바퀴의 몸이 되었고,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더더욱 직시하게 했다. 장애는 연애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데이트를 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들을 더 이상은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곳은 시설이 아니라는 것, 매일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장애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에 해일 같은 크기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기까지는 신진수 씨의 인터뷰를 재구성했습니다.]


마음껏 여행하다


여기까지가 막 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시작한 진수 씨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까지의 이야기. 사실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그를 잘 몰랐다. 아마도 장애가 없었더라면 길거리에 연예인하라고 명함을 받았겠다 싶은 훤칠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 종종 약속 없이 사무실에 들러 커피 한 잔하고 바쁘다고 사라지는 그가 참 싱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그에게 자립하고 나니 무엇이 좋으냐고 물었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최고는 자유라고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여행을 실컷 했다고 한다. 여행은 왠지 먼 데가 떠올라 어디 어디를 다녀왔나고 물으니,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제부도에 가긴 했는데, 대부분은 지하철을 타고 다녀. 언제든 전동휠체어도 충전할 수 있고, 따로 표를 끊거나 돈을 내지 않아도 멀리 갈 수 있잖아. 우리 집이 화랑대역에 있잖아. 언젠가는 집에서 신창까지 다녀와 본 적 있어. 가는 데만 세 시간 걸리던데. 그렇게 멀리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져. 어딘가로 도망갔다 돌아온 느낌.”


그의 여행이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도심 끝에서 끝까지 달리는 거, 아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러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것들. 아파트에 돌아와 대충 저녁을 챙기고 고단한 몸을 누이는 것. 때론 공과금이나 생활비에 시달리고 고민하고, 소소한 외출과 일상의 계획을 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자유가 아니냐고 그는 말한다. 보통의 남들처럼 그는 지금을 살고 있었다.


중랑구를 떠나고 싶지 않다


처음 시설에서 나왔을 때의 두려움이 여전히 있느냐고 물었다.


“중랑구에서 자립했는데 중랑구를 떠나고 싶지 않아. 이곳 사람들과 이미 관계가 생겼으니까. 처음에는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알게 되고 친해진 것이잖아. 이 과정을 밟는 게 힘들었고, 다시 시작하는 걸 원하지 않아. 난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걸 어렵게 생각하니까. 활동보조인도 마찬가지야. 복지부에서 월 60시간밖에 나오지 않고, 서울시 지원으로 40시간을 더 받아. 손으로는 물건을 집기도 어려운데 두 팔을 움직일 수 있다고 추가시간이 안 나왔어. 혼자서는 밥도 해먹을 수 없는 거지. 뜨거운 걸 어떻게 집어. 그런데 짧은 시간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새로운 활동보조인과 관계를 맺는 거야." 

 

그는 이제 새로운 전환기에 이르렀다. 주거복지사업도 막바지고, 다른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갈 준비에 바쁘다. 시설에서 나올 당시 그가 자립할 길은 당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제공되는 체험홈이었는데, 2년을 살고 나면 5년 동안 집을 제공받을 수 있는 자립생활가정으로의 전환도 안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주거복지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더 이상은 직원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거복지사업이 마무리되고, 체험홈으로 들어가는 데에 대한 답답함을 그는 이야기했다.

 

“사실 체험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임대아파트가 나올 때까지 지낼 곳이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주거복지사업은 끝나가는데, 임대아파트가 아직 안됐어. 그래서 중랑구와 가까운 근처의 강북구로 가고 싶었는데, 남는 체험홈이 없대. 임대아파트가 빨리 구해져서 가능하다면 중랑구 근처로 집을 옮기고 싶어. 편안해진 사람들과 가까운 데서 살 수 있게.”


 

인정받고 싶어


12월 초 이사준비로 분주한 그는 집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염려들 사이에 ‘하고 싶지 않아.’ ‘그만두고 싶어’란 포기는 없다. 그리고 그가 새로운 목표를 이야기한다.


“시설에서 보치아를 배운 적 있어. 자립 후 우연히 모임에 다니게 됐는데, 보치아를 시작하게 됐어. 시설에서는 별생각이 없어서 취미처럼 했던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 같아. 공식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국가대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막상 대회에 나가려고 연습을 하니 점점 어려워지긴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연습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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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째 열린 ‘이음여행’ 프로그램 중 자립생활한 선배로서 진수 씨는 자립을 고민하는 후배들과 함께 서울 시내를 여행 중이다. ⓒ고은경


국가대표가 되려고 하는데 일주일에 두 번 연습해서 되겠냐고 약간의 타박을 했더니, 연습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란다. 연습할 장소조차 없는데, 그 일이 진수 씨에게 새로운 목표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대표가 되면 외국에 나갈 수 있잖아. 멀리 여행을 갈 수 있어. 돈도 벌 수 있고. 수급비에 의지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임대아파트도 구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내 힘으로 돈 벌어서 살고 싶어. 선수 하다가 나중에는 코치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가르쳐 주고 싶고.”

 

그는 시설에서 나오면서부터 줄곧 일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 취직할 만큼 특별히 컴퓨터를 잘 다룬다거나 재주가 있는 건 아니었고,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기초생활수급에서도 탈락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안정적이지 않은 일에 수급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수 씨는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확인한다고 했다.


“시설에 있을 때 교회에서 봉사를 했는데, 예배를 할 때 돕기 위해 프로젝터를 만졌거든. 예배 순서나 성가 책 몇 장을 펴시오,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입니다…라는 글들을 입력하는 거. 그럼 사람들은 내가 찍는 안내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는 거야. 내 봉사가 사람들한테 깨달음을 주는 데 쓰인다는 게 뿌듯했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했다는 성취감 같은 게 좋았어. 나는 장애인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가도, 교회에 가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 걸 인정받는 느낌.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인정받고 싶고.”


마지막 단어 ‘인정받고 싶다’가 가슴에 와 박힌다. 시설에서 나올 때와 다름없이 그는 자립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해 스스로 발로 뛴다. 그리고 탈시설 2년, 막연했던 그의 꿈들이 형태를 찾기 시작했다. 막연히 ‘시설에서 나와 자유롭게 살고 싶다.’에서 자신의 욕구를 찾고, 삶의 몫을 찾는데 고민을 모으고 있었다.

 

인터뷰 후기

진수 형. 그는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감정들을 채 썰기 어려워했다. 시설 안에서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눴던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던 그였다. 응어리진 마음을 뱉어내기도 어려웠구나. 몇 차례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적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주거복지사업을 통해 시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을 고맙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시설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미소, 현경, 사랑이한테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 고생 많았고. 이렇게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새로운 곳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져.” 그가 남긴 마지막 소감이었다.


그는 새로운 데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함께 고민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슬프다고 했다. 그의 말을 보태, 고생스러웠을 주거복지 3년의 대장정이 좋은 동무를 만날 수 있었던 사업이 되었음에 나 역시 수고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글 효정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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